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안으로는 우리 경제가 장기 불황의 초입에 서 있고 밖으로는 미국의 통상 압박이 거세다. 이 대통령이 선거 국면에서 진보 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우클릭’한 데는 그만큼 우리 경제의 해법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 담겼을 테다. 이 대통령 스스로도 회색 지대에 가까운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좌클릭·우클릭에 연연하기보다는 실사구시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누차 강조해 왔다.
사실 우리 사회가 과격화되면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따지고 보면 보수나 진보나 지향점은 매한가지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경제적 역동성이 살아 있고 사회 안전망도 촘촘한 시스템을 지향한다. 결국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속도로 달리느냐가 관건이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속도라는 얘기다. 가령 인공지능(AI) 도입으로 생산성이 제고되면 근로자의 근무시간이 줄어들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도 주4.5일 근무, 주4일 근무가 이슈가 되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도 이런 방향성 자체가 달라질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가급적 빨리 주4.5일제로 직행할 목적으로 가속페달을 밟을지, 아니면 AI 도입, 생산성 제고, 기업 여력 등 여러 변수를 감안해 완급을 조절할지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갈릴 뿐이다. 경기 부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도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는 이는 없다. 세부적으로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국가 채무, 저성장에 따른 세수 펑크, 재정 투입에 따른 물가 불안 등을 감안해 적정 규모를 두고 생각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 경제의 문제는 대부분 가속페달을 얼마나 밟을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쟁점별로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통한 완급 조절을 어떻게 가져 갈지를 두고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워낙 다층적 위기 국면이라 한 번 삐끗하면 추락할 위험이 적지 않다는 게 이번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르다면 다른 점일 것이다.
집단 사고도 경계해야 한다. 보수 진영이 이재명 정부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 중 으뜸은 권력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대선 승리로 입법·행정·사법부를 사실상 모두 장악했고, 특히 행정과 입법부는 혼연일체라는 표현이 제격일 만큼 똘똘 뭉쳐 있다. 확증 편향에 빠지기 쉬운 구조라는 얘기다. 선거에서 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진영을 외면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조건이다. 이는 이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엄청난 힘으로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속도 조절을 잘 해내느냐에 이 대통령의 성패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계가 우려하는 상법 개정안, 노란봉투법 같은 법안도 무작정 가속페달에 힘을 주기보다는 주위를 살피며 브레이크를 적절히 밟을 필요가 있다. 적정한 수준에서 타협과 조정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기업 경영권의 과도한 침해를 막아 증시가 투기꾼의 놀이터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건전한 노사 관계를 통한 노동자 권익 증진이라는 본질적인 지향점에 이를 수 있다.
궁극적인 지향점을 생각한 결과 정권을 잡은 이후 이전과는 다른 정책을 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이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고(故)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당시 진보 진영으로부터 신자유주의에 가깝다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부실기업 처리에 나섰고, 노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우리 경제를 도약시켰다. 이는 보수와 진보 간 교집합이 생각보다 클 수 있으며 본질에 가까운 궁극적 지향에 집중하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대통령이 성장과 분배, 재정 건전성과 복지, 일(생산성)과 휴식, 기업 자율성과 투명성, 중장기적 축적과 단기 과실 사이에서 교조적 원칙에 매몰되기 쉬운 자기 진영보다 지향점에 근거한 융통성 있는 정책을 펴 나가길 바란다. 이를 잘 해낸다면 이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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