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의 희토류 공급 재개를 위한 협상 카드로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통제를 완화하는 ‘빅딜’을 적극 검토하고 나섰다.
케빈 해싯 미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9일(현지 시간) 미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 완화가 중국의 희토류 공급 재개의 절충안(trade off)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미국 측의 수출통제가 완화되고 (중국으로부터) 희토류가 대량으로 공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반도체 수출통제 완화 대상에) 엔비디아 H20 등 ‘하이엔드’ 반도체가 포함된 것은 아니다”라며 첨단 반도체는 이번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해싯 위원장의 발언이 수출통제를 중국과의 무역 협상 의제로 삼을 의향이 있음을 처음으로 시사한 것이라고 전했다. 해싯 위원장도 이날 “(협상에서) 희토류를 먼저 다룬 후 다른 작은 문제에 대한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며 이번 협상의 초점이 희토류에 맞춰져 있음을 나타냈다.
주요 외신들은 이를 두고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 카드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조 바이든 전임 정부가 동맹국과 적국을 나눠 국가별로 등급을 매기는 반도체 수출 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중국에 대해서만큼은 통제 강도를 더욱 높이는 식으로 규제를 손질하고 있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급성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지난달에는 중국의 빅테크 화웨이가 만든 어센드 칩을 사용할 경우 미국의 수출통제 조치를 위반한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희토류 부족으로 자동차 등 미국 제조 업계에서 생산 중단 사례가 잇따르자 결국 미국이 먼저 양보에 나선 모양새라는 평가다.
미국은 당장 희토류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이 지난 10년 이상 미사일, 전투기, 스마트 폭탄, 기타 군사 장비 등의 제조에 필수적인 희토류에 대한 중국의 공급을 대체할 대안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중국이 전 세계 공급량의 97%를 생산하는 사마륨은 거의 전적으로 군사 용도로 사용된다. 미국의 주력 전투기 F-35만 해도 사마륨이 약 50파운드(약 22.7㎏) 들어간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올 4월 사마륨을 포함한 7종의 희토류 공급을 허가제로 전환한 뒤 공급망을 사실상 틀어막고 있다. 앞서 전임 바이든 행정부가 사마륨 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에서 사마륨 생산 시설 2곳을 미국에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계약을 체결했지만 시장성 문제로 인해 건설되지 못했고 아직까지 중국에 100% 의존하는 상황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미국이 중국과 반도체·희토류 빅딜을 협상 카드로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희토류 공급 재개 여부를 결정할 미중 무역 회담은 영국 런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10일 이틀째 이어졌다. 전날에 이어 미국 측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참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경제 실세’ 허리펑 국무원 부총리를 비롯해 왕원타오 상무부장(장관), 리청강 상무부 국제무역담판대표(장관급) 겸 부부장이 나섰다. 지난달 10∼11일 제네바 협상 때는 없었던 러트닉 장관의 협상 참여는 그가 수출통제 업무를 총괄한다는 점에서 수출통제가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임을 보여준다. 제네바 협상 때 참석했던 랴오민 재정부 부부장이 빠지고 수출통제를 감독하는 왕 부장이 들어간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이날 사설을 통해 미중 경제는 상호 보완적이라면서 미국의 대(對)중국 첨단 기술 수출통제가 오히려 미국 기업에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설에서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가 자국 천연자원 보호를 위한 합법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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