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전년 대비 4조 6000억 원(14.7%) 줄였다. R&D 예산 삭감은 1991년 이후 33년 만의 일이었다. 정부는 재정 건정성을 이유로 들었지만 과학 기술계는 즉각 반발했고 주요 과학기술단체와 전문가들은 예산의 급격한 축소가 연구 생태계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이듬해 일부 기초연구 예산이 증액됐고 현재는 상당수 기관에서 삭감 이전 예산의 80% 수준까지 회복된 상태다.
하지만 예산 수치가 복원됐다고 해서 생태계까지 복구된 것은 아니다. 중장기 과제들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많은 연구자들의 실험 계획은 흐지부지됐고 프로젝트 단절과 평가 기준의 불확실성으로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신진 연구자들은 과제 탈락과 연구비 단절을 견디지 못해 연구실을 떠났다. 대학원생이나 포닥(박사후 연구원) 등 차세대 연구 인력은 진로를 포기하거나 해외로 이탈했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1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예산을 복구하는 데는 1년이 걸렸지만 무너진 생태계를 회복하는 데는 5~10년이 필요할 것”이라며 현 정부에 ‘연속성 있고 균형 잡힌 예산 정책’을 제안했다. 정 원장은 “지난 정부에서 증액된 R&D 예산은 지나치게 유행하는 분야에 편중되거나 정부의 생색내기 사업에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며 “새 정부에서는 도전성과 창의성을 키워줄 중소형 연구 과제와 대형 과제를 함께 키우는 균형적 예산 집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전략기술육성법에 따라 반도체·디스플레이, 2차전지, 모빌리티, 차세대 원자력, 첨단 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인공지능(AI), 차세대 통신, 첨단 로봇·제조, 양자 등 총 12개 분야를 ‘국가전략기술’로 정하고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정 원장은 이 같은 전략기술 중심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지나친 편중은 오히려 장기적 위험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배터리나 AI는 앞으로 몇 년 내 가시적 성과가 나올 텐데, 전략기술 이후 새로운 분야를 발굴해야 또 다른 미래 먹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 아니냐”며 “전략 분야 외에도 전방위적으로 기초와 기반 기술에 투자해 다양성과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림원은 대선을 앞둔 지난달 19일 ‘미래 대한민국과 과학기술을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제언서를 발표하면서 동일한 내용을 강조한 바 있다. 제언서에서 한림원은 새 정부가 취임 첫 100일 중 염두에 둬야 할 미션으로 ‘과학기술정책 패러다임 변혁’을 제시하고 “전략적 집중 투자가 필요한 대형 과제와 연구자의 도전적인 창의성을 키워줄 중소형 연구과제 사이의 균형적 발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톱다운’ 방식의 과제가 난무하는 환경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난 정부에서 예산이 많은 부분 회복됐는데 정부가 주도한 해외 협력 과제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예산이 실제 과학적 성과를 내는 게 아닌 보여주기식 사업에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산불이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공공 과학 기술도 지속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다”며 “연구자 주도의 기초 연구 공모 사업을 활성화해 창의적 탐색을 장려하고 인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근본적 연구를 동시에 지원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효율적 예산 배분을 단기간에 해내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치적 기조가 다른 정부가 출범해도 크게 변동 없이 지속될 수 있는 정책의 기틀을 시간을 두고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인재 육성에서도 “신진 연구자에서 석학에 이르기까지 생애 주기 전체에 걸친 지원이 필요하다”며 정책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현재 정부는 인재 육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여전히 신진 연구자가 처한 현실은 터무니 없이 척박하다. 정 원장은 “연구비가 줄면 가장 먼저 포닥이나 박사 과정 학생들을 내보내야 하고 결국 연구 현장은 공동화된다”며 “적어도 5년은 ‘묻지 마 투자’를 해야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신진 연구자에서 석학에 이르기까지 연구자가 생애 주기 전반에 걸쳐 안정적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연구 환경 조성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적 기조가 다른 정부가 출범해도 크게 변동 없이 지속될 수 있는 인재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이공계를 선택한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사회적 인센티브 강화, 여성 과학기술 인재 육성, 석학 정년 연장제도 정착 등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중국의 ‘천인계획’을 언급하기도 했다. 천인계획은 해외 유수 과학자들을 파격적 대우로 유치하고 자국 내 인재에게도 안정적 커리어 설계를 제공한 중국의 국가 전략이다. 정 원장은 “인재 정책은 국내에 있는 인재를 중심으로 양성하고 커리어에 맞춰 경력을 보장하고 처우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며 “해외로 인재가 빠져나가는 것보다는 이들을 유입 시키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인재 지원을 무조건적으로 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든 경쟁은 필요하다. 정 원장은 신진 연구자만큼이나 ‘스타 연구자’의 탄생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미국 사립대처럼 한국도 간접비 기반의 경쟁형 생태계로 변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해외 대학은 연구자가 연구비를 확보해오면 그 금액만큼 대학이 정부로부터 간접비 명목의 지원을 받아 학교 운영에 재투자한다. 간접비는 대학이 정부로부터 받는 연구개발(R&D) 지원금 중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은 항목을 따로 분류한 금액이다. 따라서 대학은 뛰어난 연구자를 적극 유치하고자 하며 연구자 역시 더 좋은 과제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는 구조가 된다. 정 원장은 “한국도 간접비가 존재하지만 현재는 소수 대학을 중심으로만 R&D가 쏠리는 구조로 중소 대학은 연구비 확보 자체가 어렵다”며 “연구비 유치 성과에 따라 보상을 다변화하면 연구자들이 중소·지방 대학에 정착할 수 있어 강한 연구 그룹이 생겨날 수 있을 것”고 말했다. 연구자 주도의 경쟁 생태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대학과 지역이 함께 살아나는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인재 육성 및 예산 배분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현재 과학기술 관련 사업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 등 여러 부처가 개별적으로 기획·집행하고 있어 사업이 중복되거나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분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 원장은 “컨트롤타워는 시스템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며 “특정 분야 전문가가 맡게 되면 해당 분야에 편중될 가능성이 높고 전체를 조망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국가의 축적 자산으로서 R&D를 바라볼 수 있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정 원장은 과학기술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도 새 정부가 반드시 챙겨야 할 과제로 꼽았다. 그는 “우리나라는 의대 쏠림 현상이 심하지만 중국은 과학자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대우한다"며 “청소년들이 과학자가 되는 것을 꿈꿀 수 있도록 문화적 기반이 마련돼 있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토대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회제도적 변화가 이뤄지면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까. 정 원장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가 기초과학 강국이라는 의미”라며 “10년의 큰 틀을 바라보고 청소년에게 꿈을 심어주는 한편 다양한 연구에 지원하는 작업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현 정부의 가장 시급한 대책은 인재 육성을 위해 큰 틀을 짜는 것”이라며 “그러한 작업은 과학기술계가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정부에서는 예산 삭감이 있었는데도 한림원이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과학계에서 한림원에 대한 신뢰도가 무너졌다”며 “한림원이 자성해야 하지만 정치적 독립성과 과학기술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예산 자율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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