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여파로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이재명 정부가 취약 계층의 채무 탕감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금융 당국은 최근 부실채권을 매입·소각하는 배드뱅크 설립 검토에 돌입하면서 ‘개인금융채권 관리 및 개인채무자 보호에 관한 감독 규정’ 변경을 예고하고 금융사들의 장기 소액 연체 채권 규모 파악에 나섰다. 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단순 채무 조정을 넘어 실질적인 채무 탕감이 필요하다”며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빚 탕감을 공약한 데 따른 움직임이다. 당정이 추진하는 20조 원 이상의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도 자영업자·소상공인 대출 탕감 내역이 담길 예정이다.
생계를 위협받는 취약 계층을 보호하고 그들의 재기를 돕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코로나19 과정에서 빚의 수렁에 빠진 영세 사업자들이 불황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의 채무 조정·탕감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역대 정부에서 반복됐던 채무 조정·탕감 정책이 취약층의 여건을 장기적으로 개선시키기보다는 우리 경제의 부채 리스크만 키워왔다는 점이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가 총 18조 원이 넘는 대출 원리금을 탕감해줬지만 지난해 소득 하위 20%의 신용대출액은 2018년보다 외려 53.9% 증가했다. 지난해 취약 자영업자 연체율은 11%를 웃돌았다. 내수 침체 여파로 올 1분기 기준 숙박·음식점업의 금융권 대출액은 사상 처음 90조 원을 돌파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선심 쓰듯 빚 탕감을 반복한다면 ‘버티면 안 갚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 자영업을 양산하는 데 국민 혈세를 쏟아붓느라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성장 동력 점화가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도 문제다. 정부는 성실하게 빚을 갚는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엄격한 심사 기준과 절차에 따라 채무 조정·탕감을 최소화해야 한다. 옥석 가리기를 통해 과잉 상태인 자영업 구조조정도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취약층의 자립을 돕기 위한 근본 처방은 일회성 빚 탕감이나 현금 지원이 아니라 질서 있는 출구를 마련하고 안정적인 임금 근로자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