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위 방사선 폐기장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 부지로 지정된 강원도 태백시의 지질 구조가 연구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한국형 고준위 방사선 폐기장은 화강암 지대에 만들어질 예정인데 태백시 후보지에는 화강암과 더불어 이암·사암·석회암 등이 함께 묻혀있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한국원자력학회 소속 전문가들은 13일 서울 모처에서 기자들과 만나 “태백시 고준위 방폐장 연구용 URL에서 획득한 데이터는 실제 고준위 방폐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거의 활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구용 URL은 실제 고준위 방폐장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실증하기 위해 만드는 시설이다. 폐기물 보관 기술의 안정성을 평가해야 하므로 실제 지어질 고준위 방사선 폐기물과 같은 지질 환경에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처분고가 부식되지 않고 폐기물을 잘 보관하는지, 기반암에 존재하는 미세 균열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지 않는지, 실제로 폐기물을 보관할 때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기 위해 만드는 시설이므로 최대한 실제 시설과 같은 지질 구조를 가진 곳에서 시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연구용 URL 부지 선정 공고문에도 실제 고준위 방폐장처럼 지하 500m 깊이 단일 결정질암이 분포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돼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일 결정질암은 화강암 층을 의미한다. 고준위 방사선 폐기물을 보관하는 데는 점토질 층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한반도에는 방폐장을 지을만한 점토질 층이 없어 차선인 화강암층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문제는 연구용 URL 건설 부지로 선정된 태백시의 지층을 시추해 본 결과 화강암층 사이에 여러 암종이 뒤섞인 퇴적암층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태백시 자료에 따르면 지하 150m까지는 화강암이지만 150~550m 구간에는 이암·사암·석회암이 혼합돼있다. 이후 550m 이하 구간에는 다시 화강암이 분포하는 식이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연구용 URL에서 획득한 자료를 실제 고준위 방폐장 인가에도 활용해야 하는데 실험 조건과 실제 환경이 다른 상황”이라며 “여기서 얻은 데이터는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태백시 연구용 URL 건설 사업 예산만 5000억 원이 넘고 향후 R&D 과정에도 수천억 원이 투입될 예정인데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놓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획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최악의 경우 실제 고준위 방폐장 건설에 앞서 연구용 URL을 추가로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
정 교수는 태백시 부지에서 화강암만으로 이뤄진 구간까지 파 내려가 실험하면 된다는 주장에도 반박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압력과 온도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제로 고준위 방폐장을 만들 지하 500m에서 실험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 교수는 “고준위 방폐장은 적어도 1만 년 동안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야 해 기술 난이도가 상당하다”며 “암종 구조가 복잡한 곳에서 실증하면 연구 결과의 오차값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아주 긴 시간을 가정해야 하기 때문에 오차가 조금만 커져도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 한 원자력 전문가는 “이런 구조에서 나온 데이터를 활용하느니 해외 연구 결과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연구용 URL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고준위 방폐장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는 데도 중요한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 과정에서 후보지 주민들이 연구용 URL을 방문해 어떻게 폐기물을 처분하는지, 얼마나 안전한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며 “그런데 고준위 방폐장 후보지와 다른 지질구조에서 실험하고 있으면 설득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문 교수는 “뿐만 아니라 연구용 URL은 국제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 전문가들에게 개방되는 시설”이라며 “한국형 고준위 방폐장은 화강암을 모암으로 하겠다면서 퇴적암층이 포함된 곳에서 연구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연구용 URL을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만들 때 제대로 하자는 것”이라며 “고준위 방폐장과 같은 국책사업은 신뢰성 확보가 생명이다. 문제의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다시 검토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산업부는 후보지 선정 절차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대한 경청하겠다고 답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부지선정은 관련 법과 공고문에 의거해 진행됐다”며 “부지 선정 과정과 관련된 자료는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며 의견을 수렴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용 URL 부지 선정을 주도하고 있는 원자력환경공단 역시 태백시 지질 구조에 대해 “심부 482m~518m부터 약 700m까지 화강암층이 분포함을 확인했다”며 “일본 미즈나미 URL과 스위스 몬테리 URL 역시 일부 서로 다른 암종이 섞여서 분포하는 곳에 위치해있다”고 강조했다. 또 원자력환경공단은 “아직 고준위 방폐장 최종 부지는 공모를 시작하지도 않은 단계”라며 “실제 처분 환경이 어떨지 모르는데 부지적합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현재 추진 중인 것은 처분 시설 내 지어질 URL이 아닌 사전 연구용 URL이므로 태백시 부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6월 내놓은 연구용 URL 부지선정요건 및 평가기준에 따르면 핵심 요건인 ‘암종적합성’ 영역에서 ‘공인된 지질도로 확인 가능한 단일 결정질암이 6만㎡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해당 보유 암반의 분포·연속성’ 정도도 감안하겠다고 명시돼있다. 이와함께 부지선정절차 기본방향에는 실제 지하 환경이 어떨지 예측이 곤란하다는 점을 고려해 사업 유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재공모할 수 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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