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클래식계는 한여름처럼 뜨겁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247년 전통의 라 스칼라 극장의 지휘 포디움에 오르고 소프라노 조수미는 프랑스 최고 문화훈장인 ‘코망되르’를 목에 걸었다.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에서 최고의 영예를 안은 이 두 거장을 국내에서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명훈은 부산 콘서트홀의 예술감독을 맡아 개막 페스티벌을 진두지휘하는 한편 다양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조수미 역시 본인의 이름을 내건 콩쿠르에 입상한 후배 성악가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감동의 무대를 선보인다.
완숙한 음악성과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선배 거장들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비상하는 젊은 천재들도 국내 관객들을 달뜨게 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은 올해 자신만의 진화된 음악으로 세계 투어를 이어가며 국내 무대에도 올랐다. 조성진은 장장 세 시간(인터미션 2회 포함)에 달하는 라벨 피아노 독주곡 전곡 연주라는 도전적인 프로젝트로 세계 무대를 돌며 찬사를 받고 있다. 임윤찬은 떠오르는 지휘 거장 클라우스 메켈레와 함께 잊혀졌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고 스승 손민수와는 두 대의 피아노 프로젝트도 선보이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가장 바쁜 두 연주자를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클래식 스타들의 등장은 즐기는 문화도 변화시켰다. 대중문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팬덤 문화가 클래식에도 생겨난 것이다. 인기 아이돌 팬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N차’ 관람, ‘직캠(직접 찍은 영상)’, 인증샷 등으로 공연을 즐기는 젊은 팬들이 늘고 있다. 이지영 클럽발코니 편집장은 “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팬덤 문화가 클래식에서도 번지고 있다”며 “MZ세대가 자기를 표현하는 여러 취향 중 하나로 클래식을 선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클래식도 ‘힙(개성 있고 멋진)’한 취미의 대상으로 여기고 음반을 듣고 공연을 보는 과정 전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물론 팬덤 문화의 그늘도 있다. 인기 공연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몇 초 만에 매진되는 그야말로 ‘피케팅(피가 튈 정도로 치열한 티케팅)’ 전쟁이다. 여기에는 ‘매크로 암표상’들도 한몫한다. 이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 선점한 티켓을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수십만 원의 웃돈을 붙여 판다. 아이돌 팬들 사이의 ‘디스전(비방)’과 같은 유치한(!) 일이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팬덤의 확산이 낳은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클래식 공연을 즐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공연 시장은 양적·질적으로 성장 중이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클래식 공연 건수는 2022년 6920건에서 2023년 7762건, 2024년에는 8109건으로 증가했다. 클래식 공연 매출액은 2022년 678억 원에서 2023년 999억 원, 2024년 1010억 원으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아랫목에 온기가 돌면 구석구석 따뜻해지듯 스타 플레이어의 등장은 신규 팬들을 끌어들이고 시장 전체의 성장을 유도하는 긍정적인 동력이다. ‘비인기 종목’이던 실내악, 고음악, 현대음악에까지 변화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물의 정령’이라는 K오페라를 제작해 세계 초연했고 노부스콰르텟과 같은 실내악 팀들도 자기 색을 유지하며 20년 가까이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내한 공연 역시 유명 오케스트라나 안전한 레퍼토리 위주에서 다양한 연주자와 레퍼토리로 다채로워지는 추세다.
그럼에도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최근 정명훈은 부산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의 예술감독으로서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오페라 관객을 육성하는 일이 가장 시급합니다.” 관객층이 두터워야 한국 오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클래식 아이돌’의 공연은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덜 알려진 음악가의 공연은 초대권으로도 객석을 채우기 어렵다. 국내 한 오페라단 관계자는 “재능 있는 성악가들이 넘쳐나지만 설 무대가 없어 한국을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토로했다. 문화 강국으로 가려면 기초 예술이라 할 수 있는 클래식의 저변이 더 깊고 넓게 자리 잡아야 한다. 한 줌의 스타가 만들어낸 열기만으로는 진짜 문화 선진국이 되기 힘들다. 탄탄한 클래식 문화 생태계가 기반이 돼야 뜨거운 클래식의 계절이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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