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년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지금의 영국 남부 브리튼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은 서둘러 철수했다. 그 자리에 게르만족이 들어왔는데, 문제는 그들이 로마인의 유산을 사용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즉 수도나 중앙난방, 온수 목욕 등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로마식 빌라를 비워둔 채 원시적인 형태의 집을 짓고 사용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니 익숙함이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막았던 것이라 이해할 뿐이다.
현대건축과 도시는 새로운 기술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제안에 맞춰 계속 발전해왔다. 그러나 인공지능(AI) 등의 기술이 더욱 정밀해져서 인간이 해오던 일을 완벽하게 대신해 준다면 그동안 인간끼리 머물고 지키고 유지하던 공간과 장소의 의미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소도시의 전원주택에서 사는 밀튼은 시의회 회의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완고한 79세 노인이다. 어느 날 밤, 그의 집 마당에 UFO가 추락한다. 당국에 신고했더니 장난전화로 취급받고 시의회에서도 말해보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딸조차 당장 치매 검사를 받아보자고 한다. 그는 우주선에 타고 있던 외계인을 집에 들이고 ‘줄스’라 이름 붙인다. 이웃 조이스와 샌디가 찾아와 그와 합심해서 줄스가 우주선을 고쳐 고향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줄스(Jules)’라는 영화는 외계인과 우주선이 나오지만 SF 장르라기보다는 내내 웃음을 머금고 보게 되는 따뜻한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평소 안면만 트고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외로운 세 노인은 생뚱맞게도 줄스를 매개로 친구가 되고, 밀튼의 집 거실에 모여 감춰두었던 각자의 애환을 이야기하게 된다. 말없이(당연하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외계인의 존재가 각자 갖고 있던 해묵은 응어리를 자연스레 풀어준다. 오랫동안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던 원망이나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본인에게는 중요했던 과거의 영광 등등.
20세기 중반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대머리 여가수’라는 연극이 있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대화를 나누는데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이야기를 나눈다. 소리를 끄고 본다면 그냥 일상적인 풍경이다. 아마 당시에 이미 그런 우려가 있었던 모양이다.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언어는 의미가 없고, 사람들 사이에는 소리를 반사하는 투명한 반사판이 설치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말을 걸 때 줄스는 조용히 듣기만 한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세 명의 노인들은 감동을 받았고, 끊어진 다리가 다시 복구돼 희망이 솟는 듯했다. 줄스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사인을 지속적으로 보낸다. 알아듣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각자의 몫이다. 외계인은 보통 다가올 미래, 두려움, 새로움, 인류를 구할 미지의 기술 등등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과거와 현재를 일깨우는 존재가 된다.
영화 초반 시의회 회의에서 건설업자가 시장과 시의원에게 야구장 공사 진척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목소리는 모든 것이 일정에 맞춰 진행될 것을 확약하는데, 아마도 시장의 공약사항이거나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단횡단으로 몇 번이나 딱지를 끊었다는 밀튼의 건널목 신설 민원이나 노인에 알맞은 운동을 하고 싶다는 피클볼 연습장 제안 등은 4년이나 무시당해왔음이 드러난다. 발표하는 노인들도 이미 반쯤 체념한 상태고, 듣고 있는 시 관계자들도 심드렁하다. 보고 있자니 어쩐지 무척 익숙하다.
물론 공약도 중요하고 거창한 재난 매뉴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균일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평온함을 지키고 뜻밖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아주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공통의 가치와 기본적인 상식에 서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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