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밀레니엄 직전에 태어난 한참 어린 후배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마침 카페가 있던 건물이 올초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제작한 엔터테인먼트사 본사였는데 후배들 모두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tvN의 대표작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시리즈 역시 시청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마 스토리에 공감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화중 흥미로웠던 것은 “혹시 ‘응답하라 2002’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보고 싶다”는 그들의 대답이었다. 한일 월드컵이 있었던 2002년에도 그들은 네댓 살에 불과했을 텐데 그때의 이야기에는 공감할 수 있을까. 후배들은 말했다. “또렷하지 않지만 그해 여름, 온 나라가 축제 같았던, 아파트의 층간소음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꼬마들의 기억에도 남아 있을 만큼 2002년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지금도 그 순간 ‘붉은 악마’였던 우리들이 거리 곳곳을 메웠던 웅장한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다.
10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3차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쿠웨이트를 완파하며 11회 연속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이번 월드컵은 앞으로 1년쯤 후인 2026년 6월 11일부터 한 달 여간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에서 열린다.
아직 1년이나 남은 월드컵이 뜬금없이 기다려지는 것은 아마 불안하기 그지없는 국제 정세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 곳곳이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취임 전 “24시간 내에 러·우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종전은커녕 휴전도 이끌어 내지 못한 채 이번에는 전면전으로 확산된 이스라엘과 이란의 분쟁에 직접 개입했다.
트럼프는 21일 자신의 SNS를 통해 “우리는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시설에 대한 매우 성공적인 공격을 완료했다”며 “이제 평화의 시기가 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은 미국의 개입과 트럼프 특유의 압박이 실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란은 미국의 직접 개입 시 중동 내 미군 시설에 대한 보복 공격을 예고해왔다. 힘에 의한 평화가 시작되지 못한다면 세계대전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형국이다.
전쟁의 시대에 축구는, 특히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은 평화의 메신저로 작동했다. 2002년 발발한 내전으로 갈라진 북아프리카의 소국 코트디부아르가 2005년 사상 처음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마지막 예선을 마친 후 라커룸에서 팀의 주장 디디에 드로그바가 기자들 앞에서 호소했다. “부디 총을 내려주세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평화를 선택해주세요”. 그날 이후 정부군과 반군은 일주일간의 휴전을 거쳐 대화를 시작했으며 2007년 결국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2021년 1월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의 배후를 넘어 이제는 중동전쟁의 주역이 되려는 트럼프. 그가 지난주 G7 정상회의에 잠시 참석했을 때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받은 선물이 하나 있다.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유니폼이었는데 유니폼에는 ‘트럼프 대통령께, 평화를 위해 뜁니다’라는 문구와 호날두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었다.
내년 열리는 북중미 월드컵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24년 만이자 역대 두 번째인 공동 개최 행사라고 한다. 게다가 처음으로 본선 진출국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어나 치러진다. 더 많은 나라에서 더 많은 국가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더 커진 세계인의 축제가 될 것이고 손흥민 선수가 주장인 대한민국 국대도 그곳에서 열전을 펼칠 것이다.
지난 겨울과 봄 상상을 뛰어넘는 양극단의, 내전과 같은 시간을 보낸 탓일까. 월드컵 이야기 끝에 후배들은 “내년 월드컵 국대 유니폼이 보라색이어도 좋겠다”고 했다. 파란색과 빨간색 그 중간의 보라색. 유니폼 색깔이 바뀌어 우리가 ‘붉은 악마’가 되지 못하더라도, 잠시 전 국민이 ‘아미’처럼 보이더라도, 2002년처럼 뜨거운 열기에 모두가 녹아내려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런 순간이 온다면 진정 행복한 마음으로 외쳐볼 수 있겠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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