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남쪽 57번가의 약 1.6㎞ 거리는 ‘억만장자의 거리’로 불린다. 이곳에는 ‘원57’ ‘432 파크 애비뉴’ ‘센트럴파크 타워’ 등 300~400m를 훌쩍 넘는 초호화 마천루 콘도(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한 채에 10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분양되는 이들 주거용 부동산에는 빌 애크먼, 마이클 델, 제니퍼 로페즈 등 미국 부자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갑부들까지 몰려들었다.
한때 이 거리는 골동품과 기념품 등을 파는 허름한 저층 건물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장소 중 하나로 탈바꿈했다. 과연 누가, 어떻게 뉴욕 부동산 시장을 이렇게 바꿔놓은 걸까.
월스트리트저널 부동산 담당 기자 캐서린 클라크는 이러한 궁금증을 품고 수년간 취재를 이어온 끝에 ‘억만장자의 거리’를 펴냈다. 이 책은 뉴욕 주거용 부동산 개발의 역사와 그로 인해 변화된 도시의 풍경,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개발업자들의 돈에 대한 열망과 21세기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뉴욕의 고급 주택 시장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전통적인 상류층은 ‘코옵(Co-op)’ 방식으로 주택을 소유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 전체의 소유권은 조합이 갖고 있으며 조합의 승인을 받아 지분을 매매하는 방식이다. ‘올드 머니’라 불리는 이들은 외부의 ‘제트족(사설 제트기를 타고 전 세계를 오가는 부자들)’에 대해 배타적이다. 러시아의 올리가르히, 중동의 부호, 심지어 자국의 신흥 부자들조차 조합의 퇴짜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관행이 글로벌 부자들의 진입을 막자 이를 기회로 포착한 이들은 바로 배짱 좋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었다.
1970년대 57번가와 5번 애비뉴 교차점에 들어선 ‘올림픽 타워’가 그 시작이었다. 맨해튼은 남북으로 ‘애비뉴’, 동서로 ‘스트리트(가·街)’가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5번 애비뉴는 중심 축에 해당한다. 1970년대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주도한 올림픽 타워의 성공에 자극받아 당시 30대였던 도널드 트럼프 역시 초고가 주거용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다. 복숭아색 대리석과 황동 아트리움으로 장식된 낙관주의의 상징처럼 보이는 트럼프 타워는 대흥행을 거뒀다. 이후 황금알을 낳는 부동산 시장에 수많은 개발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좁은 땅 위에 더 높고 더 화려하게 짓는 경쟁이 본격화된다. 뉴욕 콘도들이 유독 얇고 높게 지어진 이유는 제한된 부지에서 최대의 수익을 뽑아내기 위해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최신 건축 기술과 더불어 ‘용적률’과 ‘공중권’ 거래였다. 건물의 연면적을 대지 면적으로 나눈 용적률과 건물 위의 공간인 공중권을 주변 부지 소유자에게서 매입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자 개발업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억만장자의 거리’에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들을 세워 올렸다. 센트럴파크와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일수록 분양가는 더 높게 책정된다. 초고층 콘도를 통해 공중에 대한 권리마저 부자들이 독점하는 셈이다.
물론 뉴욕 부동산 개발이 성공의 보증 수표는 아니다. ‘432 파크 애비뉴’를 개발한 해리 맥클로우는 더 큰 수익을 좇아 막대한 부채를 감수하며 부동산을 매입했다가 몇 차례나 자신의 제국을 잃을 뻔했고 ‘111 웨스트 57번가’를 지은 마이클 스턴은 파트너들과의 갈등과 소송에 시달렸다. 숱한 좌절과 위험 속에서도 단 한번의 성공으로 1조 원씩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한 개발업자들의 욕망은 지칠 줄을 모른다.
더 이상 맨해튼의 콘도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개발업자들뿐 아니라 매수자들 역시 이를 철저히 투자 수단으로 간주한다. 개발사들은 안 팔려도 가격을 낮춰 분양하지 않고 소유자들조차 실제로 거주하지 않아 상당수 콘도는 비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뉴욕의 악명 높은 주거난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동경의 눈길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이 초고층 콘도들이야말로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풍경이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2만 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