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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그늘에 숨어 사는 뇌전증 환자들

손영민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김민수(32·가명) 씨는 중견 게임 업체에서 근무하는 정보기술(IT) 개발자다. 얼마 전 내 진료실을 찾아 “회사에서 약 먹는 거 들킬까봐 화장실에서 몰래 먹는다”고 털어놨다. 병가를 낼 때도 다른 핑계를 댄단다. 5년 전 퇴근하는 길에 과로로 쓰러진 후 뇌전증 진단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회사에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런 환자가 민수 씨 뿐일까. 국내 뇌전증 환자 30만~40만 명 중 상당수가 ‘숨어서’ 살아간다. 적절한 치료로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한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편견이 환자들을 그늘로 내몰고 있다. 이정훈(29·가명) 씨는 인천의 한 제조 업체 최종 면접까지 갔다가 신체검사 후 탈락했다. 실무 면접까지 잘 봤는데 갑자기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며 “이제 절대 먼저 말을 안 하겠다”고 했다.

대한뇌전증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50% 이상이 병력 공개 시 채용을 거부당했고 24.5%는 직장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영업직에 종사하는 35세 남성 환자는 운전이 필수라는 이유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운전면허 규정은 최소 2년간 발작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3~12개월)이나 유럽(1년)보다 훨씬 엄격하다. 의학적 근거보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기반한 규정으로 판단된다.

더 큰 문제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다. 전체 뇌전증 환자 중 실제 치료받는 비율은 20~30%에 불과하다. 강원도에 사는 최성현(26·가명) 씨는 “병원까지 왕복 6시간이 걸린다”며 “직장을 다니면서 정기 진료 받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뇌전증 환자 1인당 연평균 사회경제적 비용은 1846만 원이다. 의료비가 46.7%, 생산성 손실 등 간접 비용이 53.3%를 차지한다. 적절한 치료와 관리로 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의사 입장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환자들이 받는 차별과 따돌림이다. 여대생 김수진(21·가명) 씨는 “수업 중에 발작한 후 친구들이 거리를 두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고 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전염병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라고 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반인의 93%는 뇌전증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20%는 정신질환으로 오해한다. 뇌전증은 대뇌피질 조직의 일시적 흥분성 증가로 발생하는 신경계 질환일 뿐이다. 환자의 70~80%는 약물 치료만으로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 2011년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명칭을 바꿨지만 인식 개선 효과는 미미해 보인다.



국회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보건복지부가 ‘뇌전증 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등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고는 있다. 일부 기업이 채용 시 질환 관련 차별을 금지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희망적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무엇보다 ‘뇌전증 관리 및 뇌전증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 제정이 시급하다. 19·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회기 종료로 폐기됐다. 제21대 국회에서 남인순 의원이 다시 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의료 접근성을 높이려면 권역별 전문 센터 확충, 필수 검사 및 치료의 급여화, 운전면허 규정의 합리적 개선 등 정부의 정책과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외래에서 매일 만나는 수많은 환자들이 병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의사로서 다시 강조하지만 뇌전증은 관리 가능한 질환이다. 이제는 사회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때다.

손영민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사진 제공=삼성서울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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