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제조업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면 10년 뒤 대부분 기업이 퇴출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 회장은 이달 17일 경주에서 열린 ‘대한상의 하계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석유화학은 중국과 인도, 중동의 경쟁 상대도 안되고 요새 잘 나간다는 반도체도 턱밑까지 쫓아온 상황”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싼 원유가 밀려 들며 모든 석유화학 회사가 적자로 내몰릴 수 있고, 반도체는 미국의 장비 통제에도 중국이 엄청난 자원을 쏟아 부은 탓에 추격 속도가 빨라졌다고 진단했다.
최 회장은 지금의 위기가 전략의 부재와 ‘여태까지 잘했으니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서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성장하는 2000~2010년대 한국 제조업은 중간재 수출로 재미를 봤다. 한국이 호황에 취했을 때 중국은 차근차근 실력을 키웠고 주요 시장에서 우리의 경쟁자로 돌변했다. 최 회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위기를 일찌감치 내다봤다. 그는 “더 새로운 산업 정책과 전략을 내놓아야 한다고 여러 번 (정부·국회 등에)주지시켰지만 불행히도 별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제조시설 스케일(규모)은 작아졌고 노화했다”고 토로했다.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는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탓에 중국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게 최 회장의 판단이다.
희망은 AI뿐이지만 이마저도 중국이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다. AI 경쟁력의 근간인 데이터도 중국이 훨씬 많다. 최 회장은 “아직 AI가 초기인 만큼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며 “일본과 손잡고 서로 데이터를 교환해 조금이나마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정부·여당의 상법·노동조합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상법이 개정되면 일단 받아들이고, 실제로 운용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따라 고치거나 다른 대응책을 낼 수 있도록 건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에 대해서는 “부정적 영향을 막아보겠다며 1대 1로 대응하기보다는 다른 것들을 풀어 재계 전체로 더 나아지는 상황을 기대한다”고 했다. 정부가 기업 성장에 대한 의지가 확실하다면, 경영을 제약하는 새 입법을 상쇄할 ‘당근’도 내놓을 것이라는 바람을 담았다. 최 회장은 이런 과정을 ‘트레이드(교환)’라고 표현했는데, 앞서 재계가 상법 개정에 대응해 배임죄 완화 등 규제 혁신과 정부 지원 강화를 요구한 ‘패키지딜’에 대한 기대와 상통한다.
최 회장은 여당이 추진하는 자사주 일정 기간 내 의무소각의 경우 기업의 의사결정 자율성을 제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사주 프리덤(자유)을 가져가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한다”며 “앞으로는 (기업이) 자사주를 사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앞으로는 (자사주를) 사는 게 늘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법 개정이나 자사주 소각 의무화 같은 이슈는 최근 한국 증시를 달아오르게 한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최 회장은 인과관계를 떠나 증시 상승은 반기고 있다. 그는 “(주가가)올라가면 좋다”며 “계속 주가가 올라 자금도 유입되고, 우리도 투자를 많이 할 수 있고 경제도 좋아지는 선순환을 희망한다”고 했다.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 움직임과 별개로 최 회장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를 숨김 없이 드러냈다. 그는 “한국이 이제부터 성공 방정식으로 성장을 제대로 해야 한다면 민관이 완전히 원팀 형태로 가야 한다”며 “리더십이 꼭 필요한데 대통령이 그 리더고, 저희(재계)는 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계엄·탄핵 등) 혼돈기 리더십이 없다 새 정부가 출범했는데 좋은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하고 (재계도)서포트(도움)를 드릴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제조업의 위기가 산업 정책이 부재했던 ‘잃어버린 10년’의 결과물인 만큼 이제는 다른 새로운 리더십을 촉구한 셈이다.
올 해 ‘대한상의 하계포럼’은 예년과 달리 제주가 아닌 경주에서 열렸다. 석 달 뒤로 다가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경제인 행사인 글로벌 CEO(최고경영자) 서밋 등을 사전 점검하고 국민적 관심을 이끌자는 취지다. 최 회장은 CEO 서밋 의장으로서 행사 성공에 전력을 쏟고 있다. 그는 “하드웨어(숙소·행사장 등)적, 물리적인 거는 어떻게든 맞춰낼 거라고 생각한다”며 “잘 치러내려면 조금 더 소프트적인 것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외형보다 내실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특히 정부와 기업 간 여러 성과물이 APEC 기간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최 회장은 “관세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될 방안이 나오면 좋겠다”며 “전에 풀리면 더 좋겠지만 APEC도 좋은 타이밍으로 당장의 위협과 경제 타격을 완화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유력 정상과 글로벌 경제 빅샷(거물)이 대거 경주 APEC을 찾게 하려면 기대할 성과나 함께 할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는 “'잔치에 초대했는데 사람이 많았다’가 성공은 아니고 잔치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 그 일이 잘되는 게 더 좋다” 며 “너무 숫자(지도자·CEO 등)에 연연하지 않지만 욕심은 많다”고 의지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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