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걷어들이는 세수와 재정지출의 씀씀이를 결정하는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수평적 토론 형식으로 재편된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계급장을 떼고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난상 토론’ 방식이 유력하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 전체 예산의 큰 줄기를 잡아나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20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대통령실과 협의해 국가재정전략회의 방식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처럼 대통령과 전 부처 장관이 1~2일간 합숙하며 예산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했던 방식도 주요 후보 방안 중 하나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기획예산처의 제안으로 도입됐다. 당시에는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핵심 인사들이 모여 전략과 정책·예산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서 실제 국정과제 반영과 예산 구조 변화를 이끌어냈다. 현재와 같이 기재부가 작성한 계획을 승인받는 자리가 아니라 정책 우선순위와 자원 배분을 둘러싼 실질적 조정이 이뤄지는 장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공약 이행을 위한 복지 예산 증액에 반대한 재정경제부를 향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발언하며 화제를 일으킨 사건도 이 때였다. 재정전략회의가 재정을 둘러싼 정책적 갈등을 해소하고 국정과제에 자원을 배분하는 실질적 전략 기구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후 정권을 거치며 회의의 전략성과 구심력은 점차 약화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국가채무 총량 관리 등 재정 건전성 중심으로 논의 범위가 좁아졌고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회의가 ‘보고회’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특히 지난 정부에서는 문제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2022년 첫 회의에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점심 식사 이후 회의장에 복귀하지 않아 사실상 파행으로 끝났다. 2023년 회의에서는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줄이라는 돌발적 지시를 내려 부처 간 정책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회의에서는 안건 발표 이전에 부처별 자유 발언을 지시하면서 회의가 겉돌았다고 한다. 3년 내내 전략 없는 회의가 반복됐고 엉뚱한 지시로 흐름이 깨지는 일이 되풀이됐다는 게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당시 전략회의에 참석했던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윤 전 대통령이 신임을 받는 장관이 발언할 때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는 장관 순서 때는 사실상 자유롭게 발언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모 장관이 국무위원들 면전에서 크게 질책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사실상 경직적 분위기 속에서 토론이 힘들었다는 의미다.
특히 저성장의 국면에서 긴축 기조만 외쳐 경기 침체와 물가 대응 측면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이 재정 건전성에 대해 절대 흔들릴 수 없는 1순위라는 목표를 못 박아놓은 바람에 다른 정책적 목표는 내밀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새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재정전략회의를 ‘토론과 조정의 장’으로 다시 세운다는 구상이다. 대통령실도 기재부에 기존 보고회 수준으로는 이재명 대통령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며 새 판을 짤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방식이 바뀌면 예산 짜는 방식도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새 정부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직접 분야별 예산 한도를 정하고, 부처들이 그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사업 예산을 편성하도록 하는 ‘총액배분자율편성예산제도’의 기능을 복원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처럼 기재부 예산실이 세부 사업까지 일일이 간섭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선출직인 대통령이 재정 방향을 직접 잡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는 기재부에서 예산실을 떼어내 ‘기획예산처’를 만드는 구상과도 연결된다. 큰 그림과 전략은 대통령이 주도해서 짜고 실제 집행과 관리는 독립된 조직이 맡는 식으로 재정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리는 재정전략회의인 만큼 회의체가 실질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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