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가총액 약 24조 원에 달하는 알테오젠의 창업 당시 사업 아이템은 지금처럼 주목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0년 이상 지속적인 자본 투입이 이뤄져야 알테오젠처럼 결실을 맺을 수 있죠. 지금은 투자 환경이 가뜩이나 악화한 상황에서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법차손) 규제가 성공할 기업의 싹을 자르고 있습니다.”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는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삼일PwC에서 서울경제신문이 주최한 ‘바이오 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좌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상임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좌담회에는 이병건 지아이이노베이션 고문(전 회장), 황 대표, 조완석 회계법인 더올 대표, 김태영 PwC컨설팅 파트너가 참석했다.
앞서 서울경제신문과 한국바이오협회가 110개 바이오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자금난으로 연구개발(R&D)을 포기하려 했다’는 응답이 80%에 달했던 만큼 이날 좌담회에서는 자금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이 제시됐다.
-바이오 기업은 법차손 규정 탓에 R&D를 할수록 상장 폐지 위험이 커지는 구조적 악순환에 빠져 있다. 법차손 규제란 기술특례상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한 기업이 자기자본 대비 법인세차감전순손실 비율을 50%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최근 3년간 2회 이상 법차손 요건을 맞추지 못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고 상장 폐지로 이어질 수 있다.
△조완석 대표=법차손이라는 ‘대못 규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약속한 ‘바이오 강국’ 도약은 요원하다. 역대 정부 중 바이오를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하지 않은 정부는 없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로서 느끼는 현재 바이오 산업의 현실은 ‘초토화’에 가깝다. 신약을 개발하는 데 10년 이상의 기간과 대규모 자금이 소요되는 반면 개발기간 동안 매출은 내지 못하는 바이오 기업의 특성상 법차손 요건을 충족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바이오 상장사 투자를 꺼리고, 상장사에 대한 투자 회수(엑시트)가 어려워지니 비상장사 투자도 막혀버리는 악순환에 빠졌다. 바이오 산업의 미래를 이끌 2000여 개의 비상장사는 상장사들의 붕괴로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말라 죽고 있다.
△이병건 고문=법차손 규제를 없애기 어렵다고 보완하려 해선 안 된다. 전 세계에서 이런 규제가 존재하는 증권 시장은 코스닥뿐이다. 미국 나스닥 시장에 법차손 규제를 적용하면 전체 종목 중 30%가 관리종목에 해당한다고 한다. 금융위원회에서는 ‘왜 바이오 산업에만 특혜를 주느냐’고 하지만, 사실 법차손 규정 때문에 바이오 산업이 역차별을 받고 있는 거다.
△황만순 대표=법차손 문제는 바이오에 먼저 닥쳤을 뿐 앞으로 우주, 양자 산업 등도 똑같이 겪을 문제다. 그 전에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한국거래소나 금융위에서 구성한 위원회 등의 검증을 거쳐 꼭 필요한 R&D 비용은 법차손 비율 계산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R&D 비용을 전문적·객관적으로 검증받으면 회사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점을 투자자들에게 인식시킬 수도 있다.
-최근 바이오 비상장사들은 높아진 상장 문턱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성 평가는 사업성 평가로 변질됐고, 어렵게 기술성 평가를 통과해도 상장을 철회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 고문=한국거래소가 명시한 적은 없지만 상장 요건으로 ‘기술수출 2건 이상, 임상시험에 진입한 물질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는 게 공공연한 속설이다. 이런 상장 요건 때문에 바이오 기업들이 성공하기 어려운 과제라도 일단 임상에 들어가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기술수출도 이상한 곳에 하는 경우가 많다.
△황 대표=상장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신약 후보물질을 헐값에 해외로 넘기는 일도 빈번해졌다. 바이오 기업들이 상장하기 위해 기술이전을 필요로 한다는 걸 해외 기업들도 눈치채버렸다. 해외 기업들이 우리 약점을 알고 헐값에 기술을 사가는데도 기술이전을 상장 요건으로 둬야 할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 대표=기술특례상장을 위해 기술성 평가를 하는데 요즘은 기술성이 아니라 수익성을 본다고 한다. 신약 개발 전임상, 임상 1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돈을 얼마 벌었는지 물어보면 평가 받는 회사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추진 중인 기술수출은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기술성 평가는 문제가 많아 보인다. 어차피 사업성은 거래소가 평가하면 된다.
△이 고문=사실 기업공개(IPO) 외에도 다양한 투자 회수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는 ‘뉴코(NewCo)’ 모델이 하나의 대안이다. 뉴코란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자가 주도해 바이오텍이 신약 후보물질 등을 도입하고 그 개발을 전담하기 위해 세운 기업을 말한다. 국내 기업 간 공동연구나 M&A에 과감한 세제 혜택을 주면 우리 기업이 밤새워 연구한 내용이 해외 기업에 넘어가지 않고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낼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김태영 파트너=기업의 R&D 투자 금액에는 세액공제가 적용되지만 기술이전이나 M&A로 취득한 기술에는 세액공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기술이전에도 세액공제 혜택을 줘야 M&A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 M&A가 활성화되면 당장 상장을 추진하기 어려운 비상장 바이오 기업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
-R&D 자금 부족만큼이나 바이오 기업들을 괴롭히는 것은 인재 부족 문제다.
△김 파트너=바이오 업계에서는 대부분 스톡옵션으로 양질의 인재를 수급하고 있지만 스톡옵션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인재에게 보상해줄 방안으로 공격적인 세제 혜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정부가 바이오 벤처 인력에 대기업보다 높은 근로소득세 혜택을 적용해주면 인재 확보가 조금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한다.
△이 고문=중국인과 인도인들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글로벌 경험을 쌓은 뒤 돌아와 자국 산업 발전에 기여한다. 반면 한국 인재들은 국내 산업계로 잘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 큰 차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예산을 삭감해 유출되고 있는 현지 한국인 인재들을 확보해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든, 바이오 벤처든 어떻게 이들을 모셔올지 고민해야 한다.
△조 대표=국내 바이오 업계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사업개발(BD) 인력이다. 바이오 벤처 대부분이 생존 또는 상장을 위해 기술수출을 목표로 하는데 이를 실현시킬 BD 인력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 기술수출 타이밍을 놓치면 상장도 멀어진다. 하지만 경험 있는 BD 인력은 한정돼 있어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상태다. 정부가 산업계와 함께 장기적으로 BD 인력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신속한 신약 심사와 품목허가를 위해 식약처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황 대표=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규제당국의 긍정적 역할을 경험한 적 있다. 당시 식약처 전담 인력이 셀트리온의 코로나19 치료제 ‘렉키로나’와 SK바이오사이언스의 백신 생산 현장에 직접 나가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허가를 내줄지 미리 조언해줬다. 그 결과 얼마나 의약품이 빨리 개발됐나. 이후 유럽에서도 허가받은 걸 보면 무리한 결정도 아니었다. 이제 식약처 전문 심사 인력 약 100명을 과감히 충원해 신약, 신의료기기, 의료 서비스 등 심사를 효율화해야 한다. 규제도 성장의 걸림돌이 아닌 성장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 고문=이명박 정부 시절 바이오 산업 육성 사례를 상기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바이오시밀러와 줄기세포 치료제를 핵심 과제로 내걸고 식약처(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 인허가 인력을 한꺼번에 50명이나 확충했다. 당시 보건복지부와 식약처 모두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세계 최초 줄기세포 치료제 3개 품목이 모두 한국에서 나왔다. 중국 정부는 조 단위 R&D 사업을 벌이는데, 우리 정부도 더 과감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
-이외에 우리 바이오 산업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황 대표=시가총액 2조 이하의 딥테크, 미래 성장 기업에 대해서는 공매도를 제한하면 좋겠다. 이 정도면 국제 질서나 자본시장을 어지럽힐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조 대표=해외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정감사인 제도도 부담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상장사는 6년간 감사인을 자율 선임한 뒤 이후 3년간 금융당국이 지정한 감사인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 바이오 상장사는 예상보다 더디게 오르는 매출과 법차손 이슈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움이 많은데 너무 많은 회계관리비용까지 부담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국제회계기준(IFRS)을 조기 도입해 감사 비용이 2억~3억 원 올랐지만 지정감사인 제도도 비용 상승에 기여했다.
△김 파트너=기존에 중국 업체와 경쟁하던 우리 제조 기업들 중 ‘적과의 동침’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원가 측면에서 경쟁이 불가능하니 중국의 저렴한 인건비로 위탁생산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바이오 업계에서도 ‘바이오 원 아시아’라는 말이 나온다. 정부 차원에서 일본·중국과 협력해 우리 임상 데이터를 현지에서도 인정받도록 하고, 우리 기업이 활동할 무대를 넓혀줘야 한다. 이런 움직임이 곧 10년 뒤 우리나라에서 연 매출 1조 원 이상의 블록버스터 의약품이 나오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이 고문=항노화 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 전 세계적인 수요가 커지는 동시에 우리나라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산업이다. 약 20년간 우리나라 우수 인력이 모두 의학에 집중됐는데, 항노화 산업은 이러한 우수한 의료 인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K푸드, K컬처의 위상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의료관광까지 묶어 지금부터 준비하면 우리나라의 10~20년 뒤 핵심 먹거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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