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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주의 건축과 사람] 시간이 완성하는 랜드마크

가온건축 대표

'케데헌' 나온 한양도성 630년전 축성

세계인 과거·현재 공존에 매력 느껴

우리 것의 가치 알아보는 혜안 필요

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K팝 스타를 주인공으로 한국의 민담, 민화와 현대 한국의 풍경을 적절하게 잘 섞어 만든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인 관심과 흥행을 기록 중이다. 처음 공개될 때만 해도 이렇게 한국 문화에 대한 엄청난 전파력을 담은 콘텐츠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신기한 것은 거기 담긴 내용이 우리에겐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닌데 갑자기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원래 있던 것들을 새롭게 들춰내 열광하고, 세계인들이 박물관으로 한강으로 북촌으로 찾아온다.

특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적대적 관계의 두 주인공이 교감하며 만나는 낙산공원 장면은 극의 전개와 무척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한양 도성의 일부인 그곳은 원래도 옛 한양사람들이 여가생활을 즐기던 장소였다. 조선 후기 학자 유본예의 저서 ‘한경지략’에 의하면 “도성 둘레는 대략 40리가 된다. 봄여름 사이 도성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첩을 따라 걸어가며 성 안팎의 풍경을 즐기는데, 하루 안에 겨우 돌 수 있다. 이를 ‘순성놀이’라 한다”고 했다.

순성(巡城)이란 처음에는 성벽을 돌며 순찰하는 군사적, 행정적 목적이 강했던 활동이다. 한성부, 병조, 공조에서 각각 구역을 맡아 다니다 어느 순간 만나면서 차와 다과상을 곁들이게 되고, 점차 풍류가 어우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도 날이 좋으면 혜화문을 출발해 숙정문을 거쳐 백악산에 올랐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은 낙산공원으로 부르는 그곳이 옛 유생들이 순성놀이를 가던 출발점 인근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한양 도성은 전국의 백성들이 동원돼 쌓아 올린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후 궁궐 등을 짓고 나서 태조 4년(1395) 9월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했고, 정도전이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정했다. 이듬해(1396년) 600척(약 185m)을 단위로 축성 구역을 97구간으로 정했다. 98일 동안 전국의 백성 19만 7400여 명이 동원됐고,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각자 맡은 부분에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라가 바뀐 장정들은 1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낯선 곳에 와서 돌을 다듬고 이름을 새겨 성벽을 쌓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양 도성은 세월이 흐르며 성벽이 손상되면 새로운 형식으로 보수됐다. 태조 때의 성벽은 거친 자연석에 가깝고, 세종 때는 다듬은 돌로 아래쪽에는 큰 것을, 위쪽에 작은 것을 쌓았다. 이후 숙종 때는 좀더 규격화해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았다. 비록 숭례문 성벽이나 문루 등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거되는 등 많은 부분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한양 도성은 70% 정도 복원돼 축성기술의 발전상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서울에는 630년에 가까운 시간이 담긴 장소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경계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세계인들은 특히 그런 점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고 문화를 교류하고자 찾아오는 것이다. 1930년대 근대화된 생활 방식에 맞게 개량된 북촌 한옥마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현대 도시 속에 연속된 기와지붕이 과거로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서가 아니라 골목을 들어서면 일상의 공간들이 특별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먼저 우리가 모르는 가치를 알아본 뒤에야 뒤늦게 박수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때로는 낯부끄럽다. 혹 일제강점기나 개발 성장기를 핑계로 남의 것을 더 높이 보고, 우리 것을 냉동상태로 만들어 지난 반세기를 보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물론 미래의 랜드마크를 만드는 데 노력과 예산을 들이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오랜 시간이 완성한 랜드마크, 먼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의 가치와 의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혜안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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