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부여재장성지북 (중략) 이은정월제천 국중대회 연일음식가무 명왈영고(扶餘在長城之北 (중략)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라는 문장이 있다. 해석하면 ‘부여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다. … 은나라달력으로 정월(지금의 음력 11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 안에서는 큰 축제가 있다.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를 일컬어 영고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문장은 후한서 등 다른 중국 사서에서도 반복되니 이는 우리 민족에 대한 중국(한족)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강조할 부분은 ‘음식가무(飮食歌舞)’다. 축제에서 잘 먹고 노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 일부러 특기한 것으로 보면 정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의 국내 역사서는 남아 있지 않아 외국인 기록에 의존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는 현대 한국인과 비슷한 정서라는 생각이 든다. 만주 북부에 있던 부여는 고대 조선(고조선)을 잇는 한민족의 원류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잘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는 내용은 한민족의 뿌리가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글로벌 대박이다. (일부에서 이를 ‘음주가무에 능하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나 정확한 단어는 ‘음식가무’다.)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음식가무’는 사실상 우리가 말하는 ‘문화’의 기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먹거리고 노래와 춤이다. 즉 K푸드이자 K팝, 그리고 K댄스라고 할 수 있겠다. 더 확대하면 공연이 되고 전시가 되고, 문학이나 스토리가 된다.
최근 글로벌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 내용도 가만히 보면 결국 노래와 춤, 그리고 먹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입가심으로 라면을 꼭 먹어야 한다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보편적인 식습관이기도 하다. 한국적인 (K팝인) 노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고대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음식가무’ 문화의 글로벌 확장판에 다름 아닐까.
‘놀고 먹는다’는 이야기가 비난인 때도 있었다. 조선말 혼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경제개발 초기인 1960~1980년대까지 우리의 생활이 곤궁할 때는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현재는 단군왕검이 고대 조선을 세운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일본 모두보다 한국의 1인당 GDP가 높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이자 산업으로 됐다. 잘 놀고 먹고 즐기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럼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현장에서 잘 놀고 먹을 수 있게 정부나 사회는 판을 깔아줘야 한다. 바로 놀고 먹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인프라다.
대표적인 사례로 공연장을 들어보자.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가 지난 8월 13일 공개한 이재명 정부의 국정 청사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안)’에서는 문화산업 성장 기반을 하나로 ‘공연형 아레나’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대형 아레나의 필요성은 이미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최소 5만석 이상의 좌석을 가진 아레나 말이다.
국내에는 가수들이 대규모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어 때로는 축구장이나 야구장을, 때로는 실내 체육관을 빌려 사용하기도 한다.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등의 유명 가수들이 한국 공연을 외면하는 이유가 대형 공연장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 지는 오래 됐다. 아레나 건설 문제의 핵심은 예산이다. 예산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필요할 때 지출하라고 국민은 세금을 내는 것이다.
아레나 필요성을 밝히는 정부 발표는 앞서서도 나온 바 있다. 올해 3월 공개된 중장기 문화비전 ‘문화한국 2035’에서도 ‘K콘텐츠 메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콘텐츠 산업 30년을 이끌 K콘텐츠 복합문화단지 및 대표 랜드마크 조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가 바뀌고 6월 18일 문체부는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수도권에 5만 명 수용 가능한 대형 복합 아레나형 공연장 1개소 조성”이라는 내용을 밝혔다. 이어 7월 29일 놀유니버스 대표를 역임한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후보자로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사례를 들며 ‘대형 공연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민간에서 절실하게 느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여전한 아쉬움이 있다. 지난 6월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나온 아레나 조성 계획은 ‘2026년 기초조사 연구’에 들어가 현 정부 임기가 끝난 ‘2030~2032년 공사실시 및 완공’이라는 다소 한가한 내용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문제는 행동이다. 문화산업을 키울 시급한 인프라 구축 말이다.
덧붙여 하나만 더 언급해보자. 최근 ‘음식가무’의 최대 흥행 장소는 전국의 야구장이 아닌가 한다. 프로야구에서 승패에 대한 집착을 혹시 뺀다면 최근 야구장은 최고의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장소다. 관중석 아래 선수들 경기는 흥을 돋우는 ‘공연’일 뿐이다.
야구장이 아니더라도 쉽게 야구를 볼 수 있는데 지금 모든 프로야구 경기는 매일 스포츠전문채널을 통해 TV에서 방송된다. 그럼에도 집 거실을 벗어나 힘들게 야구장을 찾는 것은 음식가무의 즐거움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집에서 보는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때문에 잘 안된다는 영화관이 충분히 음미해볼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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