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시간)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웃게 한 핵심 키워드는 ‘김정은’이었다. 그는 과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김 위원장과의 만남에 대한 의지 등을 수 차례 언급하며 오는 10월 경북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의향이 있음을 피력했다.
“김정은과 좋은 관계” 거듭 강조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전 현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러시아·북한의 밀착에 대한 질문에 대해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이며 언젠가 만날 것이고,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정은과 두 번 정상회담을 했고 나는 김정은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그와 잘 지내왔으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은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되풀이됐다.
이 대통령은 "세계 지도자 중에 전 세계의 평화 문제에 (트럼프) 대통령님처럼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실제 성과를 낸 건 처음"이라며 "가급적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도 평화를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도 만나시고, 북한에 트럼프월드도 하나 지어서 저도 거기서 골프도 칠 수 있게 해주시고 세계사적인 평화의 메이커 역할을 꼭 해주시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남북 관계가 잘 개선되기는 쉽지 않은 상태인데,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며 "대통령께서 '피스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만남이)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올해 그를 만나고 싶다"고 화답했다. 덕분에 확연히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은 사후 브리핑에서 “피스메이커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표현”이라며 “이를 남북미 협상의 돌파구로 던져 이번 회담의 명언이 됐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평창 올림픽 당시 처음에는 모두들 북한 때문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느날 김정은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대화를 시작했고 북한도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했다”며 “이후 아주 성공적인 올림픽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도 기여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덧붙였다.
다자무대 기피하는 北…별도 회담 성사될까
올해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단독 정상회담을 가질 가능성도 있지만, 오는 10월 31일 열릴 경주 APEC 정상회의가 북미 대화 재개의 ‘이벤트’가 될 것이란 기대도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이 이날 트럼프 대통령을 APEC에 초청하면서 "가능하면 김 위원장과의 만남도 추진해 보자"고 제안하며 APEC 정상회의 참석 의향을 묻자 트럼프 대통령은 "갈 수 있다고 본다"며 “김 위원장과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APEC 정상회의에 비회원국을 초청한 사례는 과거에도 종종 있어왔고, 회원국 간 논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이견이 제기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김 위원장이 지금까지 다자외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여러 정상들이 모이는 다자외교 행사에선 북한에 대한 관심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 위원장뿐만 아니라 북한 최고지도자가 다자외교 무대에 참석한 건 김일성 주석 집권 당시인 1950~1960년대뿐이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도 지난달 담화에서 "북미 접촉은 미국의 희망일 뿐"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다만 김 부부장은 당시 담화에서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고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별도의 장소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게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 석좌는 트럼프 대통령이 APEC 계기로 방한할 경우 판문점에서 재차 김 위원장과 만날 가능성을 예상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9년 6월 문재인 전 대통령, 김 위원장과 판문점에서 사상 최초의 남북미 정상회담에 참석한 바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이날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간 대화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북미 대화 문제를 주협상 의제로 유도한 것은 매우 현명하고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하며 “대화 의향 표명에 김 위원장도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APEC 계기 초청을 북한이 꺼릴 가능성에 대비해 우선 남북 연락채널 복원, 연내 남북 및 북미대화 개최를 목표로 전방위적 평화외교를 가동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