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일본 홋카이도 치토세공항에 내렸을 때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맑은 하늘 아래 평야와 산림은 평온했지만 공항 인근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거대한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오갔고 기계음은 첨단 반도체 공장인 ‘라피더스’가 들어서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일본 열도 북쪽 소도시가 국가 전략산업의 무대로 바뀌는 현장이었다.
치토세시는 라피더스를 총력 지원했다. 인허가와 도로 정비, 숙소 확보를 신속히 진행했고 건설 차량이 몰려들자 전용 노선을 짜 교통 체증을 최소화했다. 라피더스는 소프트뱅크와 소니, 토요타, NTT 등이 2022년 세운 반도체 기업이다. IBM과 손잡고 2나노 시제품 개발을 마쳤으며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라피더스는 맞춤형 칩을 만드는 ‘싱글 웨이퍼’ 방식을 채택했다. 필요한 만큼 빠르게 공급하는 게 강점이다. 현지에서 만난 이들은 “이 작은 도시가 세계 반도체 지도의 한 축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좀처럼 허풍 떨지 않는 일본 국민성을 고려할 때 허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홋카이도를 다니며 자연풍광에만 취했는데 이제는 경관농업과 함께 반도체가 중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지난 8월에는 구마모토 기쿠요초에 있는 TSMC 공장에 다녀왔다.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해 15분여를 달려 도착했다. TSMC 1공장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클린룸만 도쿄돔보다 크다. 인접 부지에서는 뙤약볕 아래 2공장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구마모토가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를 유치한 건 2022년이다. 현지에서는 ‘자스무(JASM, 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라고 부른다. JASM은 2024년 말부터 자동차·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를 생산 중이다. 2022년 말 착공 이후 2년 만이니 빛과 같은 속도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때문에 2공장 가동 시기는 2027년으로 늦춰졌지만 현지 분위기는 낙관적이다.
TSMC 유치 이후 구마모토 인구는 급증했다. 지난해 일본 광역 지자체 가운데 인구 증가율 1위였다. 공장이 들어선 기쿠요마치는 4만 3000명에서 5만 명을 넘어섰다. 양배추와 당근밭이었던 공장 주변이 첨단 반도체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2년이면 충분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부활을 국가 정책으로 내건 건 2021년이다.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우기 위해서다. 홋카이도 라피더스와 구마모토 TSMC는 그 중심에 있다. 일본은 1980년대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1990년에는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6곳이 일본기업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 등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현재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일본기업은 없다. 글로벌 점유율도 10% 미만이다.
TSMC 유치는 반도체 산업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일본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1, 2공장 총투자액 중 절반에 가까운 1조 2000억 엔(약 12조 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눈여겨볼 건 지자체다. 구마모토현과 기쿠요마치는 중앙정부와 함께 치밀하게 움직였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 전용 절차를 단축하고 토지 소유자와 교섭도 지원했다. 또 공업용수와 전력 공급, 도로 등 인프라와 주거 환경을 빠르게 정비했다. 인력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여론도 우호적으로 조성했다. 아소 화산지대에 속하는 구마모토는 깨끗한 지하수와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강점이다. 반도체 관련 기업도 꾸준히 유치해 왔다. 구마모토 내 반도체 기업은 200여 개에 달하며 규슈는 일본 반도체 산업 총 매출의 55%를 차지한다.
TSMC 유치 이후 기쿠요치는 활기를 되찾았다. 주민들 표정에도 기대감이 묻어났다. 1, 2공장에서 3400명 이상 고용 창출이 가능하다. 또 TSMC와 관련된 일자리는 지역 평균 시급을 두 배 웃돈다. 관련 기업도 급증했다. 소니, 도쿄일렉트론, 미쓰비시전기, 후지필름 등 86개 이상(2024년 말 기준) 반도체 기업이 구마모토에 둥지를 틀었다. 이에 힘입어 규슈 지역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는 100건을 돌파했고, 투자액은 5조 엔(약 47조 5000억 원)을 넘어섰다. 호텔도 속속 들어섰다. 대만 직원과 가족 400여 명이 왔다. 구마모토와 대만 사이에는 매일 2~3편에 달하는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필자가 찾은 날에도 공항 로비는 대만 초등생 야구단으로 북적였다. 구마모토현은 초중고 과정을 갖춘 국제학교를 확장하고 대만인 통역사를 배치했으며, 일반 학교의 영어 교육을 강화했다. 또 구마모토대학교에 반도체 학과를 신설했고 내년부터는 대학원 과정을 운영한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초밥가게 주인은 “TSMC 직원들로 인해 매출이 급증했다”며 활짝 웃었다.
구마모토 TSMC와 치토세 라피더스의 시사점은 크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역량까지 더해지면 한국 기업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정부와 민간이 하나로 뭉쳐 반도체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 인프라 정비, 인력 육성, 신속한 행정 등 ‘원스톱 서비스’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위기 상황이다. 언론에 자주 회자되는 용인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은 6년 만에 착공했다. 일본과 대비된다. 주 52시간 근무에 예외를 두는 반도체특별법 또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은 국가 차원의 강력한 의지, 신속하고 유연한 행정, 그리고 기존 산업 생태계와 연계할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치토세의 서늘한 바람, 구마모토의 뙤약볕 속에서 만난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흥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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