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경기도 평택 5공장(P5) 건설 재개에 시동을 걸며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능력 선제 확보에 나선다.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부품인 HBM 시장 주도권을 되찾아와 ‘반도체 초격차’ 명성을 되찾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5공장 부지에서는 최근 작업자들이 철골 구조물을 옮기고 안전교육을 받는 등 본격적인 공사를 앞둔 준비 작업이 한창이다. 이르면 다음 달부터 착공을 목표로 투자를 재개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애초 계획대로라면 5공장은 지난해 착공돼야 했다. 계획과 달리 지연된 건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반도체 업황 악화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P5 착공을 계기로 HBM 공급 확대를 노린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높인 고성능 메모리다. AI 가속기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현재 시장의 주력은 엔비디아 블랙웰 칩에 탑재되는 5세대 제품인 HBM3E다. 삼성전자는 연내 엔비디아에 HBM3E를 대량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는 SK하이닉스(000660)와 마이크론의 HBM3E 제품만이 블랙웰에 쓰인다.
삼성전자는 6세대 제품인 HBM4 시장에서 승기를 잡겠다는 구상이다. HBM4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GPU인 루빈에 탑재된다.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비해 HBM 개발 속도가 한 분기 가량 뒤처졌다는 평가를 뒤집기 위해서다. SK하이닉스는 이르면 이달 내 엔비디아에 HBM4 커스터머 샘플(CS)을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제품 양산 전 마지막 검증 단계다. 통상 업계는 이 단계에서 초기 공급물량 계약을 맺는다. 엔비디아는 내년 1분기까지 HBM4 품질 검증(퀄 테스트)을 마치고 하반기 출시될 차세대 AI GPU 루빈 시리즈에 채택할 HBM4 공급사와 물량을 최종 확정할 전망이다. SK하이닉스가 먼저 수주 소식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업계는 삼성전자가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계약 소식을 전할지 주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4의 엔비디아 공급 시기를 앞당기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 P5와 함께 공사가 재개되는 평택 4공장(P4)의 나머지 라인에는 10나노급 6세대(1c) D램 공정이 도입되는 게 대표적이다. D램 업계 중 최선단 공정으로 HBM4에 탑재될 D램을 양산하는 데 활용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HBM4의 내부 양산 승인을 마치고 고객사와의 공급 협의를 위한 샘플 양산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샘플 양산은 본격적인 대량 생산에 앞서 소량의 칩을 생산해 고객사에 제공하는 단계를 말한다. 고객사는 이 샘플을 받아 자사의 제품과 잘 맞는지 성능과 안정성 등을 검증하며, 이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대규모 공급 계약과 양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행보는 절박함에서 비롯됐다. HBM 시장 큰손인 엔비디아를 경쟁사에 선점당하면서 33년간 지켜온 전체 D램 시장 1위 자리마저 내줬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올해 2분기 SK하이닉스의 D램 점유율(매출 기준)은 39.5%로, 1분기에 이어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33.3%에 그쳤다. 양사의 점유율 격차는 1분기 2.5%포인트에서 2분기 6.2%포인트로 더욱 벌어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내년부터 메모리 시장이 점진적인 회복세에 접어들고 HBM 수요가 추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며 “미리 생산 능력을 확보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선제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증권가도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는 내년 1분기 평택 캠퍼스 신규 증설을 통해 2026년 HBM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것”이라며 “올 4분기부터 HBM4 초기 생산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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