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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시험대에 오른 경기도 문화정책

조상인 백상미술정책연구소장

문화재단에 '기금 깨라'식 道압박 논란

미술관 등 '재단 더부살이'서 문제 초래

전문기관 독립성 해치는 위탁운영 바꿔야


“소장품 예산 ‘0원’입니다.”

귀를 의심했다. 경기도립 미술관·박물관 10여 곳 모두가 한목소리로 “내년도 소장품 구입 예산이 없다”고 했다. 소장품은 고사하고 운영 예산도 빠듯한 실정이라 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위시해 K컬처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지금 이게 웬말인가.

1997년 국내 최초의 광역문화재단으로 출범한 경기문화재단은 2008년부터 경기도가 설립한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도미술관을 비롯해 백남준아트센터·실학박물관·전곡선사박물관 등의 위탁 운영을 시작했고 지금은 총 10개 기관을 맡고 있다.

경기도는 8·15 광복 80주년에 맞춰 비무장지대(DMZ) 임진각에 경기도식 독립기념관 격인 ‘안중근 평화센터’ 건립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신설 기관의 격에 맞게 안중근 의사의 유묵 2점을 확보했다고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잡음이 터져나왔다. 제시된 안 의사 유묵 2점의 가격은 80억 원. 안 의사가 남긴 유묵의 경매 최고가 기록이 19억 5000만 원(2023년 12월 서울옥션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싼 편이다. 예산이 부족한 경기문화재단 측이 난색을 표했고, 도는 “기금을 깨서 사라”고 압박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경기문화재단은 설립 초기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1200억 원을 기본 재산으로 확보했다. 개인에 비유하자면 연금 같은 기금을 한 번 깨서 쓰기 시작하면 금세 허물어진다. 경기문화재단의 연평균 예산이 1500억 원이니 작정하고 쓰면 2~3년 만에 고갈된다.

그럼에도 재단은 기금 중 80억 원을 유동화했다. 구입 절차를 시작했으나 전문가 감정 과정에서 일부 유묵에 대해 “진위 확인이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이 고가의 신규 소장품을 작가나 유족과의 직거래가 아닌 방식으로 구입할 때 가격 책정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경매를 이용하는 통상 절차도 아니었다. 그렇게 뜨거운 8월이 지나갔다. 그사이 사업은 경기도박물관 구매안으로 선회했고 추경 36억 원 편성에 14억 원을 자체 모금하는 방식으로 총 50억 원에 안 의사 유묵을 구입하는 계획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K컬처가 세계의 중심이 된 지금 서울과 맞먹는 규모의 경기도 문화정책이 시험대에 놓였다. 어쩌면 문화 인프라에 대한 대한민국의 인식 수준 전체가 시험대에 놓인 것일 수 있다. “예산이 빠듯하니 기금을 깨라”는 식의 압박은 재단의 존립 논리를 훼손한다. 기금은 예산이 부족할수록 오히려 원금을 지키고 이자 수익으로 예술가와 공공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라는 뜻에서 존재하는 ‘비상금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가 한때 약 5300억 원대 문예기금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인출해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600억 원대까지 내려앉았다. 서울문화재단의 경우는 기금 유동화 요구를 받자 동숭아트센터 매입이라는 장기 인프라 전환을 택했고 현재는 부동산 수익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기금은 ‘소모품’이 아니라 ‘영속 자본’이다.

애당초 문제는 경기도 박물관·미술관이 경기문화재단의 위탁 체제로 들어간 데서 출발한다. 과거 김문수 도지사 시절의 독단적 판단이 재단의 위탁 운영 체제를 만들었고 결국은 미술관·박물관의 위축을 가져왔다. 대구시가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을 만들고 대구미술관을 산하기관으로 편입시킨 것도 유사한 사례다.

이제부터 본질적인 얘기다. 지역문화재단은 지역문화진흥법과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한 ‘정책·지원 플랫폼’이다. 반면 박물관·미술관은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의 대상으로서 소장품 수집과 보존, 연구와 전시·교육을 수행한다. 독립성과 전문성이 핵심인 지식기관이다. 지금처럼 문화재단이 뮤지엄을 ‘묶음 위탁’한 더부살이 구조에서는 관장과 학예조직이 지방자치단체의 문화국장·과장을 직접 만나 정책을 설계·협의할 기본 통로조차 확보하기 어렵다. 양현미 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위해 삼성문화재단이 있는 것처럼 뮤지엄을 위한 독립 재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이 경기지사였던 시절, 경기도 뮤지엄재단의 설립이 진지하게 검토된 바 있다. 이를테면 경기도 산하 한국도자재단이 현재 3개 기관을 이끌며 도자 비엔날레 개최 경험도 있으니 적임이다.

경기도는 한반도의 중심이다. 문화예술을 미래 먹거리로 수확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과일을 따먹고 싶다면 씨 뿌리고, 물 주고, 햇빛과 거름까지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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