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한국을 찾지만, 올해처럼 이름만으로도 클래식 팬들을 흥분시키는 악단들이 총출동하는 일은 이례적이다. 다음달까지 약 두 달 동안 베를린필하모닉, 빈필하모닉,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 등 세계 3대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LA필하모닉, 런던필하모닉, NDR엘프필하모닉, 체코필하모닉이 잇달아 내한한다. ‘서울 오케스트라의 대전’이라 부를 만한 클래식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지는 가을이 될 전망이다.
올 가을 서울이 ‘세계 오케스트라 수도’로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오케스트라가 11월 한 달간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을 갖는다.
2년만에 내한하는 베를린필은 11월 7일~9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 차례 공연을 갖는다. 베를린필은 14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 명문 악단으로, 현재는 러시아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이끌고 있다. 2019년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그는 전통과 실험의 경계를 넘나드는 해석으로, 베를린필의 사운드를 한층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진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내한에서는 세 차례 공연이 예정돼 있다. 7일과 9일에는 서곡으로 바그너 ‘지크프리트 목가’와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을 각각 연주하고, 이후에는 공통적으로 슈만 피아노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선보인다. 전통 독일 낭만주의 레퍼토리에 충실한 구성이다. 경기 필하모닉의 예술감독이자 피아니스트인 김선욱이 협연자로 나선다. 8일 공연에선 야나체크 ‘라치안 춤곡’, 버르토크 ‘이상한 관리 모음곡’,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를 선보이며 리드미컬하고 현대적인 색채를 보여줄 예정이다.
이어 11월 19일과 20일에는 빈필하모닉이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1842년 창단된 빈필은 상임지휘자 제도 없이 매 시즌 세계 거장을 객원으로 초청하는 독특한 전통을 이어온 악단으로, ‘빈사운드’라 불리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음색으로 유명하다. 이번 내한에서는 독일 낭만주의의 대가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를 맡는다.
19일 첫 공연에서는 슈만 교향곡 3번 ‘라인’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이 연주된다. 라인강의 낭만적 풍경을 담은 슈만의 음악은 빈필 특유의 부드럽고 온기 있는 사운드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4번은 장대한 푸가와 격정이 교차하는 낭만의 정점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20일에는 브루크너 교향곡 5번을 무대에 올린다. 80분이 넘는 대작으로, 틸레만의 철학적 깊이와 카리스마가 빛을 발할 작품이다. 그는 브루크너 해석의 권위자로 손꼽히며, 신앙적 장엄함과 인간적 성찰이 어우러진 해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네덜란드의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는 11월 5일과 6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한다. 1888년 창단된 RCO는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스트라빈스키 등이 직접 지휘했던 전통을 지닌 악단이다. 이번 공연은 2027년부터 RCO의 상임지휘자로 공식 취임할 예정인 젊은 거장 클라우스 메켈레가 이끈다.
5일에는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버르토크의 ‘관현악 협주곡’이 이어진다. 6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로자코비치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말러 교향곡 5번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메켈레는 20대 나이에 이미 오슬로필과 파리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세계 무대의 주목을 받은 지휘자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대담한 해석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음악은 RCO의 유연하고도 단단한 사운드와 만나,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는 ‘진화하는 클래식’의 현장을 보여줄 것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LA필·엘프필·체코필도 온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들도 한국을 찾는다.
우선 ‘젊은 마에스트로’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LA필하모닉은 오는 10월 21일과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펼친다. 두다멜과 LA필은 17년의 동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투어 무대를 한국에서 가진다. 두다멜은 2009년부터 LA필 최연소 음악감독으로 부임해, 예술성과 사회적 가치를 아우르는 비전으로 오케스트라를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 단체로 성장시켰다. 그는 2026년부터 뉴욕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취임한다.
21일에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인터미션 없이 연주한다. 소프라노 첸 레이스와 메조소프라노 베스 테일러, 성남시립합창단과 파주시립합창단이 참여하며, ‘죽음과 고퇴, 부활과 초월’로 이어지는 서사적 여정을 그린다. 다음날에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과 ‘봄의 제전’이 연주된다.
영국을 대표하는 악단인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도 10월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16일 대전 예술의전당, 17일 부산콘서트홀, 18일 경기아트센터에서 연주한다. 지휘는 수석지휘자 에드워드 가드너가 맡고, 협연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다. 서울 공연에선 멘델스존의 ‘잔잔한 바다와 순풍’을 시작으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교향곡 2번이 이어진다. 손열음의 섬세하면서도 폭발적인 연주와 가드너의 세련된 해석이 어우러질 이번 무대는, 낭만과 현대적 감각이 교차하는 순간을 선사할 것이다.
이어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한 NDR엘프필하모닉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과 함께 10월 22일과 23일 각각 서울롯데콘서트홀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브람스의 고향인 함부르크 기반의 악단인만큼 브람스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들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외에도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현대 영국 작곡가 안나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를 한국 초연으로 선보인다. 특히 2부에서는 보헤미안 정서가 진하게 풍기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7번을 드라마와 역동성이 가득한 연주로 들려줄 예정이다.
올가을 가을 오케스트라 대전 속에서 개성있는 연주와 레퍼토리를 갖춘 악단을 꼽자면 단연 체코필하모닉이다. 러시아 출신 지휘자 셰몬 비치코프가 이끄는 체코필은 28일 예술의전당에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전곡을, 29일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첼리스트 한재민과 함께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b단조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체코필은 지난해 영국 ‘그라모폰’지가 선정한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뽑히며, 민족적 감성과 낭만의 정수를 담은 해석으로 찬사를 받아왔다. 28일은 체코의 독립기념일로, 이날 체코필이 연주하는 ‘나의 조국’은 특별한 감동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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