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장바구니 물가 상승으로 최근 뉴욕시장, 뉴저지·버지니아 주지사 등 지방선거에서 대패하자 결국 농산물 관련 관세를 대거 취소할 채비에 나섰다. 관세로 인해 소고기, 커피 등 서민들이 민감해 하는 물가가 특히 말썽을 일으키자 민심을 이기지 못하고 정책 방향을 크게 튼 것이다. 연방 하원 435석 전체, 상원 100석 중 34석, 주지사 50석 중 36석이 걸린 내년 11월 3일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크게 패배할 경우 자칫 조기 레임덕(임기말 권력 누수)에 빠질 수 있기에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긴장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아가 그간 얻은 관세 수입으로 1인당 2000달러(약 293만 원)에 달하는 전국민 지원금까지 뿌리겠다는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 정책까지 공언했다. 여기에 제약사를 압박해 비만 치료제와 처방약 값을 내리고 50년 만기의 초장기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정책을 도입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또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사태를 유발했던 ‘오바마케어(ACA)’ 보조금 연장 불발로 2000만 명 이상의 건강보험료가 올라가게 되자 이를 대체할 ‘트럼프케어’까지 구상하기로 했다. 다만 이들 정책이 모두 실현될 경우 이미 38조 달러(약 5경 5586조 원)를 넘어선 연방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미국의 국가신용도와 글로벌 금융시장에도 장기적으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다.
트럼프, 서민 물가 들썩이자 소고기·커피·바나나 관세 결국 면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현지 시간) 소고기, 커피, 토마토,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 과일과 견과류, 향신료 등 농산물에 대한 상호관세를 면제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 행정명령은 13일 0시 1분 이후 수입된 제품부터 적용됐다.
주요 외신들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과 밀접한 연관이 갖는 것으로 해석했다. 앞서 백악관은 13일에도 홈페이지에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와 ‘상호 무역협정 프레임워크(틀)’와 관련한 공동성명을 각각 발표하면서 이들 국가의 기계류, 보건·의료제품, 정보통신기술(ICT) 제품, 화학물질, 자동차, 특정 농산물, 섬유·의류 등에 대한 관세를 낮추거나 철폐하겠다고 밝혔다. 에콰도르는 커피, 코코아, 바나나의 주요 수출국이고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소고기 생산국이다.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는 섬유, 의류를 주로 만들어 미국에 판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13일 취재진과의 질의응답에서 “커피, 코코아, 바나나 등의 가격이 중요하다”며 “미국에서 그런 것들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소매업자들이 관세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며 “아르헨티나산 소고기가 자연스럽게 수입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13일 뉴욕타임스(NYT)는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의 광범위한 관세 면제 대상에 상호관세 적용 국가는 물론 아직 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까지 포함될 것이라고 알렸다. 감귤류 등 식료품 가격을 안정시킬 목적에서다. 소고기 수입의 경우는 미국 축산 업계의 반발을 고려해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NYT는 “식료품 관세 면제를 실제로 시행하면 미국 국민들의 장바구니 물가 부담 증가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경제 정책이 후퇴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짚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14일 CNBC와 인터뷰에서 “일부 식품과 관련한 관세 면제를 발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 역시 12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커피, 바나나 등 미국에서 재배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중대한 발표가 며칠간 있을 것”이라며 “가격이 매우 빨리 낮아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가뭄에 1950년대 이후 소 사육 최저…커피값도 19% 급등
최근 미국의 식료품 가격 급등에는 관세를 비롯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트럼프 정권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소고기 값의 경우 2022년부터 시작된 장기 가뭄으로 인한 소 사육 두수 급감이 직접적인 폭등 원인이 됐다. 미국의 농장주들은 가뭄으로 목초지가 황폐화되고 사료값이 크게 오르자 소 도축을 앞당기거나 사육을 줄였다. 이에 따라 미국 내 사육 소의 개체 수는 1950년대 이후 70여 년 만에 최소 수준으로 급감했다. 소 사육에 필요한 에너지 비용이 빠르게 오른 점도 축산 농민들에게 부담이 됐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산에도 관세를 더하면서 미국인들이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소고기는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소고기를 사먹기 힘들어지자 닭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대체품에 대한 수요만 증가했다. 미국 축산업 전문지 비프매거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소고기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 박스 포장 소고기 가격은 13% 뛰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7일 “육가공 업체들이 불법 담합, 가격 고정, 시세 조작으로 소고기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며 법무부에 즉각적인 수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에서 불안한 흐름을 보이는 물가는 소고기 값뿐이 아니다. 미국 노동부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커피 생두 수입 가격과 소매 가격은 9월 기준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2%, 19%가량 급등했다. 바나나 값도 같은 기간 7% 상승했다. 16일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는 지난 8월 발표된 맥도날드의 2분기 실적 자료를 기반으로 저소득층의 매장 방문이 두 자릿수 비율로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경제조사 단체 콘퍼런스보드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10월 미국 소비자신뢰지수(94.6)도 상호관세 방침이 발표된 지난 4월(85.7)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가별 상호관세가 부과된 8월 이후 3개월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등 미국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국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전향적인 조치에 반색했다. 페니 웡 호주 외교부 장관은 13일 “관세 철폐를 환영한다”며 “호주산 소고기 생산업자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반겼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호주는 매년 15만∼40만 톤의 소고기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44억 호주달러(약 4조 2000억 원)어치의 소고기를 수출해 최대 대미 수출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토드 매클레이 뉴질랜드 통상부 장관도 성명을 내고 “몇 개월간 불확실성과 높은 비용에 직면한 수출업체들이 환영할 것”이라며 “다른 수출품에 대한 상호관세 철폐도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자히 사하이 인도수출기업연합회(FIEO) 사무총장 또한 로이터통신에 “연간 25억∼30억 달러(약 3조 7000억∼4조 4000억 원) 규모의 대미 수출이 상호관세 면제 혜택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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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에 따르면 제라우두 아우키밍 브라질 부통령은 15일 브라질리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관세를 10%포인트 덜 적용받게 됐지만 40%의 세율은 여전히 높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브라질의 경우는 총 관세율은 50%이지만 이 가운데 상호관세는 10%에 불과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과 친한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 재판을 쿠데타 모의 혐의로 재판에 넘긴 것을 두고 ‘마녀 사냥’이라며 상호관세 외에 40%의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같은 50% 관세라도 상호관세가 25%, 러시아산 원유 수입에 따른 ‘괘씸죄’ 관세가 25%인 인도와는 다른 구성이다.
‘50년 주담대’에 약값 인하, 2000달러 배당금 지급…‘포퓰리즘 정책’ 봇물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방향을 튼 경제 정책은 관세뿐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자신의 사진과 ‘50년 모기지’라는 글을 함께 올렸다. 이는 백악관 참모들과도 전혀 상의하지 않은 정책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빌 펄티 연방주택금융청장이 낸 아이디어로 알려졌다. 펄티 청장은 미국의 대형 주택 건설업체인 펄티그룹의 창립자 윌리엄 펄티의 손자다. 올 8월에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임명한 최초의 흑인 여성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인사인 리사 쿡 이사를 모기지 사기 혐의자로 지목해 법무부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백악관 참모들은 모기지 기간이 길어지면 장기적으로 집값을 자극할 수 있다고 우려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9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50년 모기지는 매달 내는 돈이 조금 줄어든다는 뜻”이라며 “기간이 길어질 뿐이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9일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리고 “관세 수입을 활용해 고소득층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최소 2000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연방대법원의 상호관세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포석이자 자신의 지지율을 올릴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13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미국인 1인당 2000달러의 관세 배당을 주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관세 수입은 충분하다”며 “입법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도 12일 언론 브리핑에서 “백악관은 2000달러 배당급 지급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고 있고 이를 위한 모든 법적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50년 만기 모기지도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취재진들에게 “1인당 2000달러 배당금 지급 시기는 올해 크리스마스 이전은 아니고 내년일 것”이라고 소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이달 6일 백악관에서 ‘젭바운드’ 제약사인 일라이 일리, ‘위고비’ 제약사인 노보 노디스크가 미국 내 비만치료제 가격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고비 가격은 월 1350달러에서 250달러로, 젭바운드는 1080달러에서 346달러로 싸질 것”이라고 밝혔다.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는 약값 인하로 미국 매출에서 손실을 보는 대신 3년간 관세 면제 혜택을 받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약사들과 처방약 가격을 내리기 위한 추가 협상도 진행하고 있다.
중간선거 겨냥 ‘트럼프케어’까지 나올 수도…크루그먼 “걷잡을 수 없이 재정 악화”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관세 정책까지 양보하면서 경제 기조를 바꾸는 것은 내년 11월 중간선거에 비상이 걸렸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지난 4일 지방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이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물가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요구가 행정부 내에서 터져 나왔다고 보도했다. 민주당에서도 극단적인 좌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 당선인이 선거에 승리를 거둔 배경에도 높은 생활비, 주거비에 대한 유권자들의 뿌리 깊은 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지난해 대선에서 바이든 전 대통령이 물가 관리에 실패했다는 주장을 펴 재집권에 성공한 바 있다. WSJ은 그러면서 “유권자들은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가 전반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국민들을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아가 16일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오바마케어를 대체할 새 건강보험 체계를 추진할 뜻까지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몇몇 민주당 인사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했다”며 “큰 액수를 국민들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 여부는 지난달 1일부터 이달 12일까지 최장 기간인 43일간 이어진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의 최대 갈등 사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대로 오바마케어에 대한 보조금이 그대로 종료되면 2000만 명이 넘는 미국 국민들이 이후 더 많은 건강보험료을 부담해야 한다.
상당수 전문가들과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선거용 구상들이 재정 적자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의 연방 재정적자는 감세 법안 등의 여파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더 빠르게 증가해 지난달 38조 달러를 넘어섰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 승리한 직후인 지난해 11월 말까지만 해도 재정 적자 규모가 36조 달러(약 5경 2661조 원)였던 점을 감안하면 1년도 안 돼 2조 달러(약 2926조 원) 이상이 불어난 셈이다.
더욱이 각종 생활 물가가 뛰는 상황에서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셧다운 사태 영향으로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 공무원들이 셧다운 사태 내내 무급으로 휴직하면서 자료 수집을 위한 대면 조사를 적시에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관세 해제 품목이 농산물에 집중된 까닭에 미국산을 주로 수입하기만 하는 한국은 그 혜택을 거의 입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2008년 경제지리학을 결합한 새 무역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10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1인당 2000달러 배당 지급안을 두고 “끔찍한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무책임한 조치”라며 “세입이 줄고 적자가 불어나는데 관세 수입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재정 건전성을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킬 위험한 포퓰리즘”이라고 꼬집었다.
중간선거가 가까워 오고 트럼프 대통령이 불리한 처지에 놓일수록 미국 행정부의 억지 물가 인하와 지원금 살포 가능성은 점점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한국이 우려하는 품목 관세 부과 속도도 다소 늦춰질 수 있다. 아직 관세 효과가 소비자 비용으로 완전히 전이되지는 않은 상황인 만큼 트럼프 행정부가 마주할 물가 부담이 적어도 당분간은 쉽게 줄어들지는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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