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 인식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1953년 북한도 서명한 정전협정에 따라 설치된 군사분계선(MDL)을 한국은 지금도 준수하지만 북한은 이를 ‘국경선’이라 규정하며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 한국 국방부가 17일 군사분계선 기준선 설정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한 데 대해 북한이 일주일 이상, 아니 결국 무응답으로 일관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올해에만 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열 차례 이상 침범했으며 한국의 대화 제의 이후에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한국 국방부는 이러한 충돌이 정전 직후 설치된 1292개의 표지판이 50년 넘게 방치돼 이제 200여 개만 남으면서 남북 간 인식 차이가 커졌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표지판 대부분이 유실됐고 유엔군사령부가 1973년 보수를 시도했으나 북한군의 총격으로 작업이 중단된 후 지금까지 방치됐다. 한국군이 침범에 경고 방송과 경고사격으로 대응하는 상황에서 경계 확정을 위한 대화 제안은 불가피했다. 군사분계선이 어디인지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현실은 정전 체제의 노후화와 한반도 안보 구조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북한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북한은 군사분계선과 해상 경계인 북방한계선(NLL)을 자신들과 공식 합의된 적 없다며 부정해왔다. 2013년 3월 5일 북한군 최고사령부 명의로 정전협정 무효화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전협정은 1조에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2023년 4월부터 북한은 비무장지대 내 철책 재설치와 지뢰 매설을 강화하며 군사분계선 침범을 늘렸다.
더 나아가 2023년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한국을 동족이 아닌 ‘적대적 외국’으로 규정하며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공식화했다. 이후 북한은 군사분계선이 아닌 자신들이 설정한 일방적 국경선을 기준으로 남북 단절을 제도화하는 ‘국경선화’ 작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스스로 서명한 정전협정의 국제법적 구속력을 일방 폐기하는 조치다. 올 8월 북한군의 군사분계선 침범 이후 한국군의 경고사격이 이어지자 북한은 “남측이 우리 국경선 인근에서 차단물 공사를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한국을 비난했다. 남북이 같은 선을 두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아예 다른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한 셈이다.
북한의 국경선화는 단순한 분리 조치가 아니라 ‘영토 완정’을 위한 준비다. 김정은은 2024년 2월 건군절 연설에서 한국을 ‘제1의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유사시 그들의 령토를 점령·평정하는 것을 국시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현재 진행 중인 국경선화 작업 역시 결코 방어적 목적이 아닌 공격과 방어를 혼합한 형태의 군사 조치이다. 북한이 2018년 9·19 군사 합의로 금지됐던 지뢰를 대규모로 매설하고 있다. 이는 단순 방어 목적이 아닌 전술적 통제구역을 재형성하는 조치이다. 남침 시 필요한 기습 통로는 확보하면서 한국군 특수부대의 침투를 차단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군사분계선 일대 4개 장소에서 총 10㎞ 길이로 설치된 대전차 방벽도 유사하다. 한국의 포병 타격으로부터 자신들의 장비와 병력을 보호하면서 기갑부대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지뢰와 방벽 등 장애물은 한국 측 기동을 특정 구간으로 유도해 미리 조준한 포·방사포·대전차 화기 화력에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이런 식의 차단과 유도 장애물 체계는 전형적인 공세적 방어다. 더불어 국경선화 작업을 통해 북한은 군과 주민의 탈북도 막는다. 베를린장벽과 같은 벽을 만들어 사회통제와 체제 방어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군사분계선 무시와 국경선화는 단순한 경계 분쟁이 아니라 체제 전략의 전환을 반영한 구조적 변화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비무장지대를 공세·방어 혼합형 군사 지대로 재편해 완충지대를 사실상 소멸시키고 있다. 이는 국지 도발 위험과 위기 상승 속도를 크게 높인다. 한국은 이러한 북한의 일방적 조치가 초래할 군사·정치적 파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억지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다층적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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