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000660)가 19조 원을 들여 충북 청주에 첨단 후공정 팹(P&T7)을 신설하는 것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량을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와 미국 마이크론 등 경쟁사들이 AI 메모리 시장에서 추격 속도를 높이는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설비투자를 확대해 HBM 수요를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후공정 기술을 고도화해 고객사에 HBM과 패키징을 일괄 공급하는 ‘턴키’ 방식 등 사업구조 확장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SK하이닉스는 경기 이천에 위치한 P&T4에서 AI 메모리 패키징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P&T 팹은 전공정을 거쳐 생산된 반도체 칩을 제품 형태로 완성하고 품질을 최종 검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최근 빅테크들의 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HBM 수요가 가파르게 늘면서 P&T 라인 확충이 HBM 생산 확대를 위한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SK하이닉스는 2024년 4월 미국 인디애나주에 38억 7000만 달러(약 5조 4000억 원) 규모의 패키징 공장을 짓기로 확정했지만 일부 현지 주민들의 반발로 부지 선정 절차가 지연되면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국내 거점이 필요했다. 이에 전공정과의 연계, 물류와 운영 안정성 등 측면에서 접근성이 좋은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단 내 부지에 P&T7을 짓기로 결정하고 착공 시점과 투자 규모를 확정지었다. 이천에 이어 앞으로 청주와 인디애나 공장까지 완공되면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첨단 반도체 패키징 ‘삼각벨트’를 완성해 넘치는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청주에 첨단 패키징 거점이 들어서면 팹 간 유기적인 연계도 강화된다. 청주 캠퍼스에는 차세대 D램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해 SK하이닉스가 20조 원을 투자한 M15X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전공정 팹인 M15X에서 만든 D램을 P&T7에서 후공정 작업을 통해 HBM으로 제품화할 수 있다. 이는 생산 효율성 극대화와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SK하이닉스는 M15X 클린룸을 기존 계획보다 앞당긴 지난해 10월 오픈하고 현재 장비를 반입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 등 경쟁사들의 추격에 맞서 시장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측면도 있다. 여러 개 D램을 수직 연결하는 HBM 제품 특성상 서로 다른 칩을 이어서 한 개의 반도체처럼 움직이게 하는 첨단 후공정 기술이 HBM 성능과 생산량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HBM 시장 1위에 오른 배경에도 경쟁사보다 뛰어난 패키징 실력이 있다. SK하이닉스가 최고 강점으로 꼽는 자체 후공정 기술 ‘매스 리플로 몰디드 언더필(MR-MUF)’이 대표적이다. 이 기술은 반도체 칩을 쌓아 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액체를 주입해 열을 내보낸다. 반도체 미세공정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후공정 기술을 통해 반도체를 얼마나 더 정교하게 조립(패키징)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을 가르는 ‘게임 체인저’가 된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HBM 등 AI 메모리 산업이 고객 맞춤형으로 바뀌면서 후공정 기술의 중요성이 한층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으로는 후공정 기술 고도화를 통해 고객사에 HBM과 패키징을 동시에 제공하는 사업 확장을 구상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AI 가속기용 2.5D 패키징은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TSMC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데 SK하이닉스가 여기까지 확장하면 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
아울러 청주 팹 건설을 통해 SK하이닉스는 정부의 지역 균형 성장 정책에 발맞출 계획이다. P&T7이 완공되면 SK하이닉스 청주 캠퍼스는 낸드플래시와 HBM·D램 생산부터 첨단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통합 반도체 클러스터로 발돋움한다. 회사 관계자는 “청주 P&T7 투자를 통해 단기적인 효율이나 유불리를 넘어 중장기적으로 국가 산업 기반을 강화하고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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