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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 호의 반란, 그 숨은 얘기





1789년 4월 28일 새벽 5시 무렵, 남태평양. 타히티섬과 호주 중간 부근 해역을 항진하던 영국 군함 바운티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선원들을 함부로 대하고 폭언을 일삼던 함장에 대한 항거였다. 반란을 주도한 항해사 크리스천은 유혈 사태 없이 배를 장악하고 블라이 함장을 보트에 실어 바다에 내려놓았다. 선원 45명 중에서 반란에 동조하지 않겠다던 준사관과 부사관 17명도 함장과 함께 쪽배에 실렸다.

세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일까. 선상 반란의 장면이 낯설지 않다. 영화 뿐 아니다. 소설과 연극도 많다. 남태평양에는 이들에 대한 얘기가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영화나 소설의 주제는 간단하다. 억압과 정의의 대립, 영국 해군 수병과 원주민 여인 간의 사랑. 시대에 따라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랐을 뿐이나 실제 사건의 배경과 내용은 보다 복잡하다. 파장도 적지 않았다.

바운티호는 애초엔 군함이 아니었다. 1784년 건조돼 민간 상선으로 쓰이던 배를 영국 해군은 1787년 매입하고 뜯어고쳤다. 개조의 주안점은 화물칸 확대. 함장실조차 온실로 바꿨다. 직사광선이 적재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유리도 불투명한 간유리로 바꿔 끼웠다. 화물칸의 습도를 유지하는 원시적 장치까지 넣었다. 도대체 무엇을 적재하려고 배를 고쳤을까.

답은 빵나무. 바운티호의 공식 임무는 측량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남태평양 특산물인 ‘빵나무(breadfruit)’ 묘목의 운송에 있었다. 조리하면 빵과 비슷한 맛을 내는 열매가 달린 빵나무 묘목의 행선지는 서인도제도였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 비싼 곡물 대신 빵나무를 먹여 수익을 늘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영국과 전쟁 끝에 독립한 미국으로부터 식량 공급이 어려워진 가운데 사탕수수 재배업자들과 무역업자들은 해군을 움직였다. ‘베시아’라는 상선을 사들여 군함 겸 묘목운반선으로 개조한 것도 상인들이 압력이 통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개조된 상선의 이름을 바운티호로 바꾸고 함장에 윌리엄 블라이를 앉혔다. 블라이는 적임자처럼 보였다. 제임스 쿡 선장 밑에서 세계를 처음으로 일주한 경험이 있던 인물이었기에.

블라이도 반겼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단행된 군축으로 신분이 예비역으로 바뀌어 급여가 절반 이상 깎인 뒤 무역선에서 일하던 블라이는 현역 복귀와 특별 상여 지급을 약속받았다. 문제는 바운티호의 근무 여건. 이런저런 기구를 많이 싣는 통에 선원들의 주거 환경이 나빠져 불만이 차올랐다. 더욱이 민간인 생물학자 2명을 포함해 모두 46명인 선원 중에는 해병이 한 명도 없었다. *

블라이가 항로를 단축하다며 시도했던 위험지역 돌파가 실패하자 선원들의 함장에 대한 불신이 한껏 높아졌지만 바로 천국이 찾아왔다. 타히티에 상륙한 것이다. 타이티에서 선원들은 5개월 동안 빵나무 묘목을 기르며 원주민 여인들과 달콤한 시간을 가졌다. 목표인 빵나무 묘목 1,015개를 실은 바운티호가 출발할 때 수병들과 정이 든 타히티 여인들은 애타게 눈물 흘렸다.

출항 24일째 선상 반란을 일으킨 크리스천 등 주모자들은 배를 몰아 남태평양 섬을 돌다 5개월 만에 타히티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하선한 인원이 15명. 남은 주모자들은 여인 14명을 포함한 타히티인 20명을 태우고는 어디론가 떠났다. 어딘가에 내리자마자 그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배를 태웠다. 내부 배신자가 생겨서 탈출하는 경우와 항명 탈영병을 잡으려는 영국 해군을 피하기 위해 배를 불사른 반란 주모자들의 소식은 오랫동안 끊겼다.

블라이 함장은 어떻게 됐을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식량이라고 고작 5일분만 실었던 보트에 탄 18명 중 17명이 섬과 섬의 열매로 연명하고 피지주민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6,500㎞ 바다를 항해해 구조받았다.** 블라이 함장 일행이 런던에 귀환한 1790년 3월 영국은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펼쳤다. 프랑스 혁명이 터져 언제 영국으로 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블라이 일행은 ‘불굴의 정신을 지닌 영웅’으로 포장돼 국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영국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선상반란은 반드시 제압한다’는 전통을 지키려 524톤짜리 쾌속함 ‘판도라’호를 타히티에 급파해 14명을 잡아들였다. 귀환하던 중 풍랑을 만나 4명이 죽고 결국 10명이 영국에 호송돼 재판받았다. 무죄 4명과 사면 3명에 3명은 교수형.

블라이 함장은 승승장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 웨일스의 총독까지 맡았다. 럼주 불법거래를 근절하라는 임무를 받고 부임한 그는 가혹하게 병사들을 대해 다시금 반란을 야기했다. 1808년 1월 호주 주둔 영국 군대의 병사들이 술의 공평한 배분을 주장하며 일으킨 ‘럼주 반란’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블라이다.***

사라졌던 크리스천 일행에 대해서는 온갖 얘기가 떠돌았다. 피케엇 섬에 숨어 들어간 그들의 존재는 은신 150여년 만에 바운티호의 불탄 잔해가 발견되면서 공식 확인됐다. 섬에 들어온 그들은 치정에 얽혀 서로 죽이고 죽었다. 주모자 크리스천도 타히티계 남성에게 살해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앙심이 깊었던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피케엇 섬에는 후손 50여명이 살고 있으나 연속된 근친혼으로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바운티호 사건은 각 개인보다 영국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이 노예제도를 공식폐지(1833년)하는 데도 작용했다. 6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한 해군이 작은 민간상선 ‘베시아’호를 1,950파운드에 구입해 개조비용 4,456파운드를 들여 군함 바운티호로 바꾼 연유에서부터 밀수업자들이 판치던 노예무역에 관여한 이유를 추궁하는 과정은 노예폐지론의 목소리를 높여줬다.

바운티호 사건은 워낙 유명해서인지 다양한 분석 틀에 의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호주의 문화인류학자인 그렉 드닝은 선상반란의 원인을 ‘언어 세계의 예의를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선원들과 의사 소통에서 주파수가 안 맞는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선장의 선장다움을 실현하지 못했고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렉 드닝의 시각에서 우리를 본다. 언어 세계의 예의는 존중되고 소통구조는 온전한가. 말단 공무원부터 대통령까지 공직자다운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당시 영국 해군에서 승선 해병의 평소 임무는 선내 감찰과 선상 반란 제압 및 함장 경호. 함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던 해병이 승선했다면 크리스천의 선상반란도 무혈이 아니라 피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 블라이 일행이 기적처럼 귀환하는데 도움을 줬던 피지는 구조적인 비극으로 접어들었다. 블라이 일행이 쉬는 와중에서도 제작한 해안지도와 마을의 기록을 토대로 마음씨 고운 영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고, 뒤따라 찾아온 영국 상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총을 팔았다. 내전으로 힘이 약해진 원주민들은 1874년 영국에 굴복하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국인들은 피지에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한다며 낙천적 기질의 피지인을 기피하고 인도인 노동자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오늘날 피지 인구의 절반씩을 양분하는 토착 피지인들과 인도계 피지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싸우고 있다. 피지에게는 블라이 일행을 도와줄 게 아니라 상어밥이 되도록 내쫓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블라이는 호주 지방의 총독직에서 밀려나는 부침을 겪었어도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승진을 거듭해 해군 소장까지 올랐다.

*** 호주 주둔 영국군이 정량 지급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은 영국 사회의 반성과 성찰을 불렀다. 새로 부임한 식민지 총독 매쿼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상수단을 썼다. 죄수들을 사면하고 심지어 관리로 등용했다. 런던은 경악했으나 백인 사회안에서나마 사람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엷어진 호주는 도약을 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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