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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선물

[식담객 신씨의 밥상]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양갱'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집 가까운 곳에서 오전에 업무를 보고, 오후에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입니다.

하늘빛은 푸르르고 바람은 선선합니다.

밥상 위엔 된장국과 갓 지은 밥 냄새가 향긋합니다.

“You‘ve got mail~”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들립니다.

아직 7시가 되지 않은 시간, 뭔가 급한 용건 같습니다.

’통화 좀 하자. - 막내 고모‘

전화를 겁니다.

예상대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입니다.

할머니는 14년 전 마지막 뵈었습니다.

내 삶엔 종종 예상치 못한 풍랑이 일었고, 운명 반, 의지 반으로 친가 식구들과 소원해지게 됐습니다.

“고모, 알겠습니다. 이따가 뵐게요.”

마음이 착잡합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나 슬픔과는 다릅니다.

오전 업무는 내가 주도해 기획한 아주 중요한 일이라 빠질 수 없습니다.

계획한 대로 일을 잘 마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그제서야 장례식장으로 향합니다.

시골로 내려가는 버스 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칩니다.

아버지는 11남매의 장남이셨습니다.

어릴 적 집안은 그럭저럭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국민 학교(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할아버지께서 동업자로부터 배신을 당하며 집안이 휘청댔습니다.

사춘기를 갓 맞은 소년이던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방의 도시로 떠나셨습니다.

자동차 부품상 사환으로 시작해, 어른이 되어선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물류기업에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 우리 형제가 태어났습니다.

오랜 세월 노력하며 그럭저럭 기반을 잡고 살아가다가, 뜻밖의 계기로 할머니가 계신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결정이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산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난 새로운 지역이 싫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 학교를 옮기며, 벗들과 인사도 못 나누고 하루아침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생소한 말투가 어색했고, 짖궂은 녀석들의 텃세에도 부딪혀야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일을 찾느라 치열한 날들을 보내셨고, 졸지에 시댁에 들어오신 어머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렇듯, 아버지는 항상 내게 엄하셨습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모질게 다그치셨습니다.

게다가 내가 무뚝뚝하고 안 똑똑해서였는지, 구박은 구르는 눈덩어리처럼 커져 갔습니다.

사실 별로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죄다 내게 화살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눈치를 봐야 했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찌글 찌글한 날이면 할머니는 저녁 밥상에서 맛있는 반찬을 내 밥 위에 얹어주셨고, 종종 용돈도 주셨습니다.

사실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런 팍팍한 집안에 태어난 내가 싫을 뿐이었습니다.

1988년 2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원인과 상관없이, 난 또다시 화풀이의 대상이 돼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엄마한테 혼나고, 형에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책상에 엎드려 꺽꺽대며 울고 있던 내게 할머니가 다가오셨습니다.

“아무도 안 볼 때 실컷 울어둬라. 오늘은 줄 게 이것뿐이다.”

양갱이었습니다.

반 토막씩 아껴서 드시던 걸 통째로 주셨습니다.

“할머니, 나 과자 안 좋아해요.”

“그래도 먹어 봐. 폭폭할 땐 단 음식이 약이다.”

아무 말 없는 내게 한 마디 더 건네시는 목소리가 얕게 떨렸습니다.

“다 할미 탓이다. 할미가 아빠를 잘 키우지 못해서 그런 거니, 아빠 미워하면 안 된다.”

할머니가 자리를 떠나신 후 양갱을 입에 넣었습니다.

말캉말캉 미끄덩한 식감, 단팥 특유의 짭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습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어깨의 들썩임도 사그라들었습니다.

세 시간이 지나 도착한 장례식장, 14년 만에 보는 친척들 얼굴이 낯섭니다.

“저 할머니 인사만 드리고 갈게요.”

“그래도 밥 한 술 뜨고 가. 그냥 가면 할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어?”

막내 고모 말씀에 자리에 앉아 밥을 먹습니다.

가족들이 자리에 찾아옵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아버지. 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빠도 잘산다. 어디서든 잘 살 테니, 너도 항상 건강해라.”

발인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를 때까지, 우려했던 갈등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가시는 길, 가족들에겐 이해와 배려의 마음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엔 마음이 놓이고, 다른 상황엔 더 착잡해집니다.

그래도 인연이 아주 끊어지지 않아 다행입니다.

14년 만에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아빠 미워하면 안 된다.”

할머니는 먼 여행을 떠나시며, 내게 마지막 양갱을 나눠주셨나 봅니다.

양갱(羊羹)은 팥앙금과 우무(해조류 우뭇가사리를 끓여 식힌 끈끈한 물질), 설탕, 엿 등을 함께 쑤어 굳힌 과자입니다.

단팥묵이라고 순화해서 부르라는데, 단팥묵은 오늘 저도 처음 보는 단어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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