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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592년 한산도 대첩

보급로 끊긴 왜군 끝내 패퇴





선조 25년(1592년) 7월8일, 한산도 앞바다. 거북선 3척과 판옥선 52척을 포함해 96척을 거느린 조선 수군과 전선 73척으로 구성된 일본 수군이 맞붙었다.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행주대첩·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과 이억기·원균의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전선도 잃지 않고 적 전선 47척을 침몰시킨 뒤 12척을 빼앗았다. 우리 수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를 당한 반면 왜군은 6,5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투를 앞두고 왜 수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처음으로 주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실력을 몰라본 왜군은 수군도 육전에 투입했으나 뒤늦게 이순신 장군의 존재를 파악하고는 수군 장수 3명을 급히 불러들였다. 특히 용인전투에서 단 1,500여 기병으로 전라·경상·충청 3도 관찰사가 급히 모은 5만 근왕군을 패퇴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바다에서 한번 싸우고 육지로 돌아가 전공을 세우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기고만장했던 그는 견내량에서 발견한 조선 수군 소함대를 뒤쫓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에 걸려 모든 함선과 병력을 잃었다.



한산대첩은 이후 전장 판도를 바꿨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썼다. “이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가 보존되고 요동과 천진에 왜군의 발자국이 미치지 못해 명나라의 구원병이 우리를 도와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순신의 공이었으니,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왜군이 당한 가장 큰 타격은 보급로 상실. 15만 대군이 먹을 막대한 군량을 서해 연안을 통해 보급하려던 왜군이 차선책으로 택한 육로 수송은 곳곳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에게 막혔다.

이순신의 수군이 전해오는 연전연승 소식은 조선 백성들에게 ‘싸워서 이긴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보급을 받지 못한 왜군은 의병과 명 구원병에 밀리며 한성에서도 물러나 부산과 울산 일대에 성을 쌓고 웅크렸다. 조일 7년 전쟁 동안 조선은 국력이 소진되고 경작지의 3분의2가 황폐해질 정도로 피해를 입었으나 한산대첩을 계기로 왜군을 끝내 물리쳤다. 조선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소한의 준비. 이순신 장군 같은 지휘관을 발탁하고 화포를 정비한 덕분이다. 이순신 장군과 한산대첩의 정신이 지난해 진수한 해군 최초의 전용 훈련함뿐 아니라 국민들의 가슴에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은 언제든 일본의 흉계를 물리칠 수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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