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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부엌’으로 제주 엄마들의 이야기를 전하다" 한예종 출신 예술인 김하원 대표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 ⑨] "해녀와 함께 2080이 상생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창업을 넘어 ‘창직 하는 사람(Job Creator)’들이 늘고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회사에서 찾지 못한 직업 정체성에 대한 숙제를 개인들이 스스로 고민해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해녀의 부엌’을 통해 치유와 공감의 공간을 만든 김하원 대표.




고등학교 때 연기에 빠진 김하원 대표는 연기과로 전공을 시작하며 고향인 제주도에서 본격 서울 살이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그가 생각하던 제주도는 왠지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도시에서 진실된 연기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커리어를 조금씩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숨을 걸며 물질하는 제주 해녀들의 해산물이 제값을 못 받는 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녀의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해녀와 어촌은 가족이자 동네 사람들이었다. 무언가에 홀리듯 김하원 대표는 휴학 후 제주로 왔고 지금의 ‘해녀의 부엌’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해녀의 부엌’은 종달리에 30년 간 문 닫았던 어판장에서 시작되었다. 해녀들이 사용하던 공간에 해녀들이 주인공인 공연을 만들고, 해녀가 채취한 음식을 다이닝으로 전했다. 제주 엄마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러를 만난 후 사람들은 치유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연기를 통해 인생을 찾다

- 배우가 되고 싶었던 계기는?

“어릴 때 원래 한국무용을 배웠다. 무용과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 집안 여력이 안 돼 고등학교 1학년 때 무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다른 진로, 결국 연기였나?

“사실 처음은 뮤지컬이었다. 무용하면서 단역으로 뮤지컬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이 좋아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무작정 인근 국민대학교를 찾아 아무 뮤지컬 관련 교수님 연구실에 불쑥 찾아갔는데, 그 교수님께서 연기 공부를 먼저 하라고 권해 주셨다.”

- 처음 연기를 배웠다. 어떤 경험이었는지?

“연기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내 삶이 치유가 되기도 했고. 내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른 인물을 통해 하게 되었고, 그 과정은 나를 제대로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이게 연기의 진짜 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 연기를 하며 이름까지 개명했다고?

“그렇다. 원래 나란 사람은 굉장히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세상에 반항심도 많았고. 그런데 연기를 하며 스스로 많이 부드러워 졌고, 삶의 가치관이 점점 긍정적이 되어갔다. 어린 나이에 연기로 인생 한풀이를 제대로 했다. 그 때 지금의 이름인 김하원으로 개명 했다.”

- 연기를 통해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나?

“배우를 꿈꾸며 연기를 한 건 아니었다. 연기를 통해 나를 ‘치료’ 했던 것 같다. 당시 고2, 고3 시절이었데, 그 때의 나는 사고뭉치이자 대학도 포기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하며 처음으로 칭찬이란 걸 받았다. 나의 연기에는 감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적 변화가 일어났다.”

- 어떤 내적 변화를 느꼈는지?

“내가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 연기를 활용해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 결국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타 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입학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 학교는 여배우를 양성하는 곳이더라. 배우가 꿈이 아니었기에 나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고. 고등학교 때 배우고 느낀 연기라는 것과도 다른 방향이었다. 2년 후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로 들어갔다.”

- 한예종 입시 준비는 어땠나?

“사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고교시절 한예종 연기 영재 과정을 배우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왜 이전 학교를 그만두려고 하는지, 도피하는 건 아닌지. 그 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배우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 연기를 하고 싶다고.”

- 한예종에서는 어떤 것들을 공부했는지?

“입학과 동시 ‘아동 연극 놀이 과정’을 배웠다. 친구들이 보통 듣는 필수 과목들은 듣지 않고. 아동 심리나 치유를 포함, 아동과 관련된 수업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김 씨는 타인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연기를 고민했다.




연기로 아이들을 치유하다

- 왜 아동 심리 공부에 매달렸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 치료 수업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강남에서 학원을 차리기도 했고. 그 곳에서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연기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들을 제공했다.”

- 연기로 어떤 치유의 과정을 거쳤는지?

“손에 물감이 조금만 묻어도 비명을 지르는 아이가 있었다. 그런 친구와는 신문지로 물감을 찍는 놀이부터 시작한다. 나중에는 온 몸에 물감을 바르며 함께 즐기고. 어질러져도 괜찮다는 걸 놀이를 통해 함께 극복한다. 말을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대체로 내제된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 친구들과는 상황극 놀이만 했다. 놀이에 흠뻑 빠지게 되면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 대학교를 다니며 학원을 병행했다.

“사실 아동 치료에 관심이 있어 시작한 건데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고, 점점 하겠다는 아이들이 몰렸다. 덕분에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꽤 많은 수입을 벌 수 있었다.”

- 연기를 통한 아동 치료, 어떤 경험이었나?

“연기의 힘을 느꼈다. 그 때부터 연기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시작했고. 내가 느낀 치유를 다른 이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면?

“살면서 나에게 틀렸다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던 어른들이 많았다. 세상에 정답은 왜 꼭 하나여야 하는지 늘 의심했다. 그런 지점들을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정답이 없어도 괜찮고, 너의 이야기도 맞을 수도 있다고. 그 순간, 아이들이 치유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 잘 하던 아동 치료, 갑자기 그만뒀다.

“대학 1학년 하반기부터 2년 반 좀 넘게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연극 치료를 공부하고 싶어 미국 학교들을 알아봤다. 그러다 어머니를 보러 잠시 고향인 제주로 내려왔는데 어머니의 고민을 들으며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김 씨는 아이들의 다양한 의견이 옳고, 정답이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톳’과의 인연, 다시 제주로

- 어머니 일을 도와주다 다시 제주로 왔다.

“사실 어머니가 암 투병을 했었다. 내가 미국 유학을 고민하던 때는 완치 된 상황이었고. 그 때 어머니가 제주산 톳으로 조청 만드는 걸 시작했다. 암 환자들은 많은 약을 복용하다보니 칼슘 섭취가 쉽지 않는데, 대체할 식품을 고민하다 톳 조청을 만드신 것이다. 암 투병중인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다 입소문이 나 누가 사업으로 해보라며 제안을 하셨다.”

- 톳 조청의 사업화는 어떤 과정이었나?

“일단 사업 계획서 쓰는 걸 어머니가 도와달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곳이 ‘농수산품 콘테스트’라는 제법 큰 대회였다. 농림수산부와 해양수산부, 청와대과 주관한 서바이벌 형식이었다. 최종 10팀에 선발됐고, 결국 해양수산부 장관상을 받았다.”

- 콘테스트 때문에 휴학까지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큰 대회였고, 나중에는 KBS에서 촬영까지 할 정도였다. 발표에 방송에 챙길 일들이 많다보니 학교를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 지금은 안정적으로 사업화가 됐는지?

“수상 소식을 듣고 제주도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도내 프로젝트에 지원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다행히 결과가 좋았다. 결국 어머니가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 반면, 제주 톳의 현실을 알고 심란해졌다고?

“어머니 사업계획서를 도와드리며 제주 톳 가격에 대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해녀들이 채취하는 제주도의 자연산 톳 90프로가 일본으로 수출 되는데(일본은 톳 시장만 2천억 규모다.) 일본 내에서는 오히려 양식 취급을 받았다.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게 속상했다.”

- 어느 정도로 인정을 못 받은 건가?

“제주도 톳은 해녀들이 직접 채취하는 자연산이다. 그런데 유일한 창구인 일본에서 대우를 못 받으니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주 도민으로서 그 현실이 너무나 억울했다.”

- 그러다 ‘뿔소라’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고?

“뿔소라 역시 제주 해녀들의 채취로 1년에 2천톤 정도가 얻어지는데 그 중 80프로가 일본으로 수출된다. 그런데 엔저현상 등으로 가격이 점점 하락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제주도에서 최저가 보장을 해줄 정도가 되었고. 톳 때문에 억울한 마음이 또 다시 올라왔다.”

-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해산물들이다.

“톳도 뿔소라도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해산물이다. 그러다보니 해산물 시장이 큰 일본에 수출될 수밖에 없고. 안타까운 건 이 제품들이 일본 말고는 납품할 곳이 없음을 알고 단가를 계속 낮췄다는 점이다. 톳과 뿔소라, 연이은 문제를 알고 나니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지금까지 해결이 안됐을까?

“인지도가 낮은 문제도 있지만 생산자의 고령화 문제도 있었다. 현재 제주 해녀들의 평균 연령이 70대다. 또 농업과 달리 수산업을 단체로 구성되어있다. 바다는 공유 재산이므로 수산업은 단체를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섬이다 보니 도시를 배척하며 내부를 중시하는 문화도 강하고. 그래서 도전과 변화 자체가 어렵다는 속성들이 있었다.”

- 결국 청년 도민이 나서게 되었다.

“제주 청년 도민들이 움직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간 아무도 안 해왔다. 농촌에 있으려고 하는 청년은 잘 없지 않나. 지자체에서 하는 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고. 나 역시도 고민 됐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내 나이 대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톳과 뿔소라 이야기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해녀들의 문제.




30년간 문닫은 종달리 어판장의 부활

- 김하원 대표도 해녀 집안이었나?

“할머니, 고모, 증조할머니 모두 해녀였다. 해녀는 전승하는 문화가 있는데 전승을 받으면 해녀 조합원이 되고, 물질을 할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 제주도에게 해녀는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의 딸이나 며느리라면 자연스레 되는 게 해녀였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고 지금은 많은 분들이 다른 길을 선택하지만. 예전에는 해녀가 아니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 ‘해녀의 부엌’, 어떻게 만들어졌나?

“한예종 동기, 선배들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녀라는 주제만 있었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콘텐츠 공모전 등 지원 사업에도 도전해보고. 그러다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위해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는 방향을 고민하게 됐다.”

- 어판장을 선택한 이유는?

“지금의 어판장처럼 방치된 공간이 많다는 정보를 들었다. 공간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연인데 공연은 돈이 안 되고. 결국 제주도는 맛집 투어가 돈이 되니 이를 접목시켜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공연과 다이닝을 결합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브로드웨이 배우 지망생들이 운영하는 미국의 한 레스토랑 이야기를 들었다. 레스토랑이 무대가 되고 서빙을 하며 공연을 한다고. 그간 공연은 보는 행위, 식사는 먹는 행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사례가 자극이 됐다. 어판장을 활용, 공연과 다이닝을 동시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 30년 넘게 문 닫은 어판장을 오픈했다.

“공간을 여러 곳 봤는데 규모가 딱 떨어지는 공간이 여기밖에 없었다. 다만 30년 정도 비어있던 공간이라 리모델링이 만만치 않았다.”

- 공간 활용을 위한 어촌계 설득은 쉬웠나?

“처음에는 어촌계에서 흔쾌히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베타 테스트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 즉 공연과 다이닝을 함께 하는 방식을 보여드리기로 했다. 다행히 이를 본 후 어촌 계장님부터 해녀분들까지 너무나 좋아하셨고. 공연 자료를 만들어 제주도에 제안을 했다. 뿔소라 문제는 제주도의 오랜 고민이었으니 우리가 이렇게 해결해보겠다고.”

- 리모델링 자금, 어떻게 마련했는지?

“다행히 9천만원 정도 사업 자금을 받아 공간 리모델링을 할 수 있었다. 제주도 해녀문화유산과 홍충희 과장님, 종달리 어촌계 김태민 계장님께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우리의 취지를 잘 이해해준 덕에 ‘해녀의 부엌’을 오픈할 수 있었다.”

- 시가보다 20프로 더 높게 뿔소라를 구입한다고?

“뿔소라는 해녀들 채취의 60프로 이상을 차지하는 주 소득원이다. ‘해녀의 부엌’에서는 원래 판매가보다 높게 뿔소라를 사와 다이닝 재료로 활용기로 했다. 한 해 다이닝으로 사용하는 뿔소라만 5톤이 넘는다. 현재 인터넷으로도 뿔소라를 판매하며 조금씩 늘려가는 중이다.”

30년간 문 닫은 어판장, ‘해녀의 부엌’으로 다시 태어났다.




‘해녀의 부엌’ 치유와 공감의 공간

- 공연 시나리오는 어떻게 만들었나?

“초창기에는 한예종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 이후 극작 하는 분이 관객으로 공연을 보러 왔다가 ‘해녀의 부엌’ 직원이 됐다. 덕분에 현재 총 4편의 공연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고. 실제 해녀가 주인공이다 보니 그 스케줄에 맞춰 4편의 공연을 셋팅한다.”

- 실제 해녀가 연기하는 건 쉽지 않았을텐데?

“맞다. 그래서 캐릭터로서의 연기가 아닌 인물로 할 수 있게끔 장치들을 만들었다. 사실 전체 러닝 타임이 100분이라 전부를 소화할 수도 없고. 초반 배우들이 공연을 한 후 주인공인 해녀가 해산물 이야기를 들려주고, 밥을 먹으며 작성한 관객들의 Q&A를 답변 해주는 흐름이다.”

- 해녀의 이야기는 어떻게 수집했나?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를 담아야 하기에 인터뷰 과정만 한 달이 걸린다. 이를 시나리오로도 작업 해야 하고. 출연자 중 최고령 해녀분이 어느덧 89세다. 그런 분들에게 해녀의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한다는 것, 여기에 작지면 출연료도 드리고 있다.”

- 예약 현황은 어떤지?

“현재 44석이고 금토일만 공연하는데 늘 만석이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공연을 쉬고 있다.) 음식은 뷔페식으로 제공하며 일부 따뜻한 음식만 별도 서브한다. 처음에는 28석으로 시작했는데 규모가 꽤 커졌다.”

- 공연 외에도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영상 콘텐츠를 활용한 다이닝도 준비 중이다. 가끔 외부에서 공연을 초청받기도 한다. 최근 문화재청 사업으로 충무로 ‘한국의집’에서 공연과 다이닝을 진행하기도 했다.”

- 해녀에게도 관객에게도, 핵심은 ‘치유와 공감’이라 들었다.

“해녀와 관객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치유를 받는 것 같다. 해녀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며 그간에 삶을 치유 받고, 그 이야기를 들은 관객들은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단절된 개인, 관계, 사람들이 이 공간을 통해 치유와 공감을 하는 놀라운 경험들이 하고 있다.”

- ‘해녀의 부엌’은 김하원 대표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나?

“연기의 힘이 어마어마함을 느꼈다. 앞으로도 이 공간을 통해 연기의 스펙트럼이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연기의 마법이 해녀와 관객들에게 치유로 작용되길 바란다.”

김 씨는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과 다이닝으로 100분의 시간을 보낸다.


김 씨는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과 다이닝으로 100분의 시간을 보낸다.


김 씨는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과 다이닝으로 100분의 시간을 보낸다.




청년 벤처 기업인이 되다

- 최근 ‘해녀의 부엌’이 15억 기업 가치 평가를 받았다.

“그간 ‘해녀의 부엌’을 하며 이런 저런 지원금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최근 15억 밸류 평가로 2억 5천 만원 정도의 투자금이 들어왔다. 책임감과 부담감이 점점 커진다.”

- 직원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배우 포함 10명이 함께한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뿔소라 판매 및 배송 등 CS 업무를 하고. 제주에 살며 ‘해녀의 부엌’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함께 해나가는 중이다.”

- 의사 결정 등 문제는 없는지?

“경력자가 없는 회사다 보니 어려움이 늘 있다. 덕분에 매일이 고군분투다.”

- 올해 ‘해녀의 부엌’의 목표는?

“신규 2호점 오픈. 하고 싶어 하는 어촌계가 많은데 신중하게 확장을 준비하려 한다. 하반기 오픈이 목표이고 지금과는 다른 콘텐츠와 타겟팅으로 더 다양한 고객을 만나고자 한다.”

- 외부에서의 관심, 부담은 없는지?

“아직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앞으로 ‘해녀의 부엌’이 우리 팀, 해녀, 어촌계 모두에게 내 브랜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중에 제주 출신 김하원 없이도 잘 돌아가면 좋겠다.”

- 수익은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나?

“작년에는 다행히 흑자였다. 매출 2억 2천만원 정도. 초반에는 좌석도 적고 공연 횟수도 적어 지금처럼 안정화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올해는 10억 매출을 목표로 달리는 중이다.”

새로운 시도가 담긴 2호점, 하반기 오픈 목표로 준비 중이다.




‘해녀의 부엌’만의 비즈니스 모델

- 비즈니스 모델은?

“문화 플랫폼을 활용한 유통 판매 비즈니스가 최종 목표다. 최근 15억 가치 밸류도 유통으로 받은 것이고. 지금은 뿔소라로 유통을 시작 했지만 추후 제주도내 모든 수산물을 취급할 날을 꿈꾼다. 우리나라 1등 해산물 유통사가 최종 바람이다.”

- 이후 판매 제품 라인업은?

“군소라는 달팽이과 해산물을 고려하고 있다. 해삼, 우뭇가사리, 성게 등도 좋은 아이템이라 생각하고. 2020년에서 취급할 해산물들이 보다 많은 소비자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 ‘해녀의 부엌’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치유로 시작했지만, 스토리가 담긴 공간을 만들었고, 유통을 통한 비즈니스 모델까지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 것들이 이제 와 보니 다 연결 돼있는 것 같다.”

- 해녀와의 상생을 꿈꾼다고?

“사실 해녀들이 있기에 2080을 아우르는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최고의 파트너인 해녀와 상생하는 2080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 김하원 대표의 궁극적인 꿈은?

“연기로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치유하는 과정을 평생 선물하고 싶다. 그 대상이 아이였다가 지금은 해녀들이지만. 향후 할 수 있다면 대상은 무한할 것이다.”

- 로컬 사업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로컬 사업도 사업이고 결국 매출과 성장이 목표다. ‘해녀의 부엌’도 좋은 일 하는, 해녀들을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닌, 해녀들과 상생하는 파트너쉽으로 발전하고 싶다. 자선사업이 아닌 상생이 우리의 비전이다.”

- 추천 하고 싶은 로컬 사업 사례가 있는지?

“전주에서 한복 대여 사업을 하시는 분. 이 분은 한복으로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 문화를 만들고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 좋은 자극이 된다.”

- 지역 창업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어딜 가든 나는 용의 머리가 되겠다고 대답하곤 했다. 제주도로 내려온 것 역시 제주도에 시장성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다. 환경이 나를 만들어주는 게 아닌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 마음으로 창업을 한다면 좀 더 큰 그림을 만들거라 믿는다.”

우리가 몰랐던 해녀들의 이야기. 이 곳에서 흠뻑 빠져보길 바란다.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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