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플이 삼성전자의 구글-안드로이드 기반 제품들 중 일부가 자사의 기술, 사용자 인터페이스, 제품과 포장 디자인을 베꼈다며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법원에 제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애플의 제소 이유는 주로 트레이드 드레스와 상표권 등 지적재산권과 관련되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트레이드 드레스는 1989년 미국에서 히트 상품의 무분별한 베끼기를 방지하려고 도입한 제도다. 상품의 모양, 색상, 크기 등 전체적인 외관과 느낌 look and feel 으로 모방이나 표절 여부를 판단한다.
삼성전자는 사태를 좌시하지는 않았다. 휴대폰 관련 기술 특허를 많이 보유한 회사답게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한국과 일본, 독일 법원에 맞제소를 했다. 삼성의 제소 이유는 데이터 전송 효율 관련 기술, 수신 오류 저감 기술, PC의 무선데이터 통신 기술 등 주로 기술 특허 침해였다. 아직 법원의 판결을 속단하기 어렵지만, 세계 휴대폰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두 강자 간의 지적재산권 전쟁이 더욱 심화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디자인 수준이 선두주자 애플을 위협할 만큼 향상된 것이 이번 소송의 실질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어떻게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 역량을 갖추게 되었을까?
글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삼성과 애플의 소송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아직까진 속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 소송을 계기로 삼성전자의 디자인 역량이 애플의 견제를 받을 만큼 성장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1996년은 삼성 디자인 혁명의 해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는 초창기부터 디자이 너를 채용해왔다. 하지만 독자적인 디자인 개 발 역량을 갖추는 데는 오랜 기간의 준비가 필 요했다. 기술력 열세라는 악조건 속에서 저렴한 제품을 대량생산하고 수출하려면 선진 기술의 습득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에 디자 인 분야는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수원에 있던 ‘상품기획 및 디자인센터’를 서울 로 이전하는 등 디자인경영을 본격화시켰다.
경영 패러다임을 양에서 질로 바꾸기 위해 디 자인 역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강한 의지에 따라 삼성전자는 1996년 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제정했다. 이회장은 그해 신년사에서 디자인 같은 기업의 가장 중요 한 자산인 창의성에 따라 21세기의 진정한 승 자가 결정된다고 강조하고, 삼성의 철학과 영혼 을 반영하는 독특한 디자인 개발에 역량을 집 중해달라고 당부했다. 단순히 제품 외형을 예쁘 게 치장하는 수준을 넘어 삼성만의 혼이 담긴 디자인을 창조해내려면 경영진이 강한 디자인 마인드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찬 발언 이었다.
1997년 갑자기 불어 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그 후에도 삼성전자의 디자인 역량 강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톰 하디 등 국내외 디자인 전문가들과 협력해 ‘이성과 감성이 조화되는 소비자 중심의 디자인’ 이라는 비전을 수립했고, 중장기 디자인경영 전 략도 마련했다. 디자인기능을 사업부문별로 분 산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음에도, 삼성은 2001년 서울 도심 삼성 본관 인근에 중앙집중 형 디자인경영센터를 설립했다.
밀라노 선언과 혁신적인 디자인 개발
디자인 중심으로 경영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이 회장의 노력은 해외에서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 다. 2004년 11월 홍콩 디자인센터는 ‘제 1회 디 자인 리더십상’ 수상자로 이건희 회장을 선정했 다. 그 후 2005년 4월 이회장은 이탈리아 밀라 노에 설치된 삼성전자의 여섯 번째 해외디자인 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해 CEO에서 현장 사원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의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재인식해 세계 일류의 명품을 만들라는 ‘제2의 디자인혁명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화답은 디지털미디어사업부문에 서 먼저 나왔다. 당시 디자인경영센터장과 영상 디스플레이부문 사장을 겸임했던 최지성 삼성 전자 부회장은 멋진 와인 잔을 연상시키는 독창 적인 디자인의 보르도TV를 개발해 TV 시장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때 최 사장은 “어떠한 어려 움이 있더라도 디자이너들이 당초 제시한 대로 제품을 개발하라”는 엄명을 엔지니어들에게 내 렸다고 한다. 2006년 봄에 출시된 보르도TV는 미국 디지털 TV시장에서 20%의 점유율을 차 지해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를 선두자리에 올 려 놓았고, 세계시장에서도 2007년 8월 말까지 모두 520만 대를 판매해 1위가 됐다.
디지털 생활가전 사업부에서도 디자이너들 이 주축이 돼 4도어 프리미엄 냉장고 ‘콰드로’ 를 개발했다. 미국 등 선진국 소비자들의 맞춤 형 식품 보관 수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디자 인된 콰드로 냉장고는 독립적인 온도middot;습도 조절 기능을 갖춘 4개의 냉각실로 구성됐다. 콰드로 는 2,999달러라는 초고가에도 불구하고 출시 직후부터 미국시장에서 인기몰이를 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06년 3월 20일 자 커버스토리 에서 콰드로를 ‘꼭 구입해야 할 주방가전 제품’ 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2006 국제전자제품전시 회 CES에서 ‘최고혁신상’을 수상한 콰드로는 그 후 국내 시장에서도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휴대폰 부문에서도 고객의 니즈를 최우선적 으로 배려한 제품들이 속속 시장에 나왔다. 넓 은 화면과 손에 쥐기 편한 형태로 디자인된 이 건희폰, 블루블랙폰, 벤츠폰 등이 잇달아 누적 매출 1,000만대를 기록했다. 특히 최근 핸드폰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스마트폰 부문에서 삼성전자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선두주자인 애플과 경쟁하고 있다. 지난 4월 말 영국에서 처음 출시된 갤럭시S2는 아이폰4보다 월등한 하드웨어 성능과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큰 인기 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영국의 유 력 IT 매체인 모바일 초이스는 갤럭시S2를 한 마디로 “눈부시다 Brilliant”라고 평가했다.
디자인경영에선 리더십이 승부처
이런 성과를 낸 데에는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디자인 혁신을 통해 삼성 제품의 품격을 한 차원 더 높이라고 강력한 주문을 했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삼성과 애플의 소송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아 직까진 속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 소송을 계기로 삼성전자의 디자인 역량이 애플의 견제 를 받을 만큼 성장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제까지 애플은 ‘시장 선점 First to market’ 전략에, 삼성전자는 ‘따라잡기 Fast Follower’ 전략 에 주력해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두 기업의 디자인경영 진검 대결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 갤럭시S2는 ‘독창적인 새로움’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은 가능성을 읽을 수 있 다. 우선 하드웨어면에선 4.3인치 슈퍼 아몰레 드 플러스를 탑재해 화질은 훨씬 더 밝고 선명 하면서도 두께는 8.9㎜, 무게는 121g에 지나지 않는다. 볼륨 키는 왼손 엄지손가락, 전원 키는 검지와 중지가 닿는 곳에 배치하는 등 소비자 편리성에 세심하게 배려한 점도 돋보인다. 특히 기기를 움직여 화면을 늘리거나 줄이는 ‘모션 UI’나 홈 스크린에 날씨와 뉴스, 이메일, 증권, 일정, 메모, 액자 등 다양한 위젯을 넣을 수 있 는 ‘라이브 패널’ 등은 독창적인 사용자 인터페 이스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때 선진국 제품의 OEM 생산기지에 불과 했던 삼성전자가 세계적 수준의 디자인 역량을 갖춘 IT 강자로 우뚝 섰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 운 일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에게도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많은 험로가 놓여있다. 차별화된 디 자인과 브랜드 경쟁력으로 감성의 벽까지 뛰어 넘는 제품을 개발해 명실공히 세계 최고 기업 으로 성장하려면 디자인경영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게 강화해야 할 것이다.
정경원 교수는...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정경원 교수는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현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장(부시장)을 역임한 바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