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기업 사회다. 대기업의 성공은 재벌을 낳았고 한국 경제의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이제 재벌의 도움 없이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부와 재벌이 반목하고 있다. 자본주의 정치의 핵심은 기업을 키우고 대기업을 다루고 재벌을 상대하는 것이다. 왜 싸우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누가 이길 것인가.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말했다.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세요. 더 투자하고 더 연구하세요.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세요." 2001년 11월이었다. LG그룹은 2차 전지 사업을 포기할 작정이었다. LG화학은 1996년부터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일단 3년 만인 1999년 양산 체제를 갖추긴 했다. 하지만 시 장성까지 갖추진 못했다. 전 세계 2차 전지 시장은 이미 니켈 수소전지를 앞세운 일본 업체들이 석권한 상태였다. LG화학 의 2차 전지 시장 진출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LG그룹 최고경 영진 사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2001년은 아직 외환위기 의 후유증이 가시기 전이었다. LG그룹은 외환위기 탓에 LG 반도체를 빼앗기다시피 했다. 또 다시 반도체만큼이나 천문 학적인 투자가 필요한 사업에 손을 대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 에 없었다. 2차 전지 사업은 벌써 적자가 눈덩이가 돼가고 있 었다. 사업 포기를 검토해야 한다는 LG그룹 최고경영진의 주 장은 누가 들어도 합리적이었다. 반면에 사업을 계속해야 한 다는 구본무 회장의 주장은 누가 봐도 비합리적이었다. 경영 진들 앞에서 뚜렷한 수치나 근거를 든 것도 아니었다. 구본무 회장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2011년 4월 6일 LG화학 오창테크노파크에선 이명박 대통령까지 참석한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렸다. LG화학의 세계 최대 자동차 배터리 공장 완공을 기념하는 자 리였다. 전기 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쓰이는 리튬이온전지 시장의 규모는 2015 년이면 16조 원 규모에 이를 전망이다. LG화학의 2015년 매출 목표는 일단 4조 원 이다. 그것만으로도 LG화학은 세계 시장의 4분의 1을 석권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김반석 LG화학 부회장은 밝혔다. "사실 2015년 매출의 80% 정도는 이미 주문을 받 아놓은 상태입니다." LG화학은 이미 GM과 볼보, 창안, 현대, 르노, 포드와 자동차 용 2차 전지 공급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4조 원 매출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것도 얼 마든지 가능하단 얘기다. 2010년 LG화학은 5억8,600만 개의 2차 전지 셀을 생산 했다. 선발 업체인 일본 산요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사업 포기까지 고려했던 2차 전 지 사업은 10년 만에 LG그룹의 효자 상품이 됐다. 2차 전지는 2000년대 삼성전자 의 반도체가 그랬던 것처럼 2010년대 한국 경제를 견인할 대표적인 수출 상품이 될 전망이다. 미래가 왔다. LG그룹의 총수 구본무 회장의 비합리적인 경영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미래다.
2003년 말이었다. LG카드 사태가 불거졌다. 마구잡이로 카드를 남발하다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LG카드는 자본금 6,000억 원을 바탕으로 금융 기관에서 30조 원이나 빌려다 썼다. LG카드가 부도 처리되면 시중 은행까지 줄초상 날 판이었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LG카드 채권단은 결국 빌려줬던 돈을 투자금 형태로 출자 전환했다. 이자 놀이 좀 하려다가 아예 물려버린 꼴이었다. 산업은행이 출자 전환한 자금 규모만 1조 원이 넘었다.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다. 국민 세금으로 투자한다. LG카드를 살리는 데 혈세 가 투여된 셈이었다. LG카드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유달리 아끼던 회사였다. LG그 룹은 그때도 지금처럼 삼성그룹과 치열한 1위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LG카드는 당시만 해도 삼성을 앞서고 있던 유일한 LG계열사였다. 구본무 회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LG카 드를 공공연하게 칭찬하곤 했다. 2001년 8월 LG그룹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서였다. 구본무 회장은 말했다. "LG전자 김쌍수 백색가전 담당 사장과 LG카드 이헌출 사장을 본받으세요. 사장이 1등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직원들을 영차영차 독려해서 일하니까 1등 하지 않습니까."
LG카드 사태는 복합적인 실패 사례였다. 외환위기 이후 내수 부진을 만회하려던 김 대중 정부의 서민 금융 정책도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LG카드가 자기 자본의 수십 배 에 이르는 부채를 머금은 부실 덩어리로 부풀어 오르는 데는 LG그룹 구본무 총수의 비합리적인 1등 욕심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LG그룹 관계자는 LG에 불었던 1등 바람 을 이렇게 묘사했다. "회장님도 1등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LG전자 백색가전과 LG카 드에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2등짜리 사업을 몇 개 갖고 있는 것보다 1등짜리 하나 갖고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LG카드가 무너지고 있을 때 그 자리에 1등 총수는 없었다. 구본무 회장은 LG카드 지분 15.88%를 갖고 있었다. 최대 주주였다. 그렇지만 나머지 84.12%의 지분이 남의 돈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구본무 회장은 LG카드에 대해 비합리적인 경영 권능을 누렸다. 정작 LG카드가 다 망해가자 구본무 회장은 딱 자기 지분 정 도만 책임을 졌다. 합리적인 위기 대응이었다. 어두운 과거다. LG그룹의 총수 구본무 회장의 비합리적인 경영이 없었다면, 없었을 과거다.
주거니 받거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정부 좋고 기업 좋고, 그런 식이었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신년 하례식은 지난 3년 동안 이어져온 정부와 재벌 간 상생협력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이었다.
마지막 비즈니스 프렌들리
>>>2011년 1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여의도 전국경제인 연합회에서 26명의 대기업 회장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매년 음력설과 추석 무렵이면 열리는 명절 하례식이었다. 청와대 로 회장단을 부르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전국경제인연합회 를 찾았다는 게 이례적이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단면이라 고들 했다. 프렌들리한 단면은 또 있었다. 26명 재벌 총수들 은 이름표를 달지 않았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걸로 전해졌 다. "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딱딱하게 명찰이 무슨 필요 가 있습니까. 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만나겠습니다." 하례식 자리에선 내내 웃음소리 와 덕담이 이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2011년은 벽두부터 휘 황찬란한 2010년 대기업 실적 발표로 장식됐다. 삼성전자는 2010년 매출이 154조 원을 넘어섰고, 영업이익은 17조 원, 순 이익은 16조 원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현대차는 매출 37조 원, 영업이익 3조 원, 순이익 5조 원이었다. 기아차 역시 순이 익이 2조 원을 넘어섰다. 대한항공도 매출 11조 원, 영업이익 1조 원을 기록했다. 현대중공업의 순이익은 3조 원이었다. 사 상 최대, 또 사상 최고였다. 2010년은 분명 한국 대기업들한 텐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였다.
그 자리에서 재벌 총수들도 한 보따리씩 선물 꾸러미를 풀어놓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대통령 앞에서 국내 30대 재벌이 2011년에 113조 원을 투자하고 12만 명을 새로 고용 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30대 재벌은 2010년엔 100조8,000 억 원을 투자했다. 1년 만에 투자 규모를 12%도 넘게 늘리겠 단 공약이었다. 2011년에 12만 명을 추가로 고용하면 30대 재벌 종사자는 모두 102만 명에 달할 참이었다. 2009년엔 90 만 명이었다. 재벌 회사 월급쟁이 100만 명 시대가 열리는 셈 이었다. 삼성그룹의 2011년 투자와 채용 규모만 해도 획기적 이었다. 총 투자액은 43조 원에 달했다. 30대 재벌 투자 규모의 절반 가까이였다. 신규 채용 규모는 2만5,000명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선물을 준 비했다. 대기업들이 수도권에 연구개발 센터를 지을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겠다고 약 조했다. 정부의 지역 균형 발전 정책 탓에 연구개발 센터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서울 을 떠나기 싫어하는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온 게 사실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정부 좋고 기업 좋고, 그런 식이었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 들의 신년 하례식은 지난 3년 동안 이어져온 정부와 재벌 간 상생협력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이었다.
청와대는 180도 바뀐 정책 기조의 선봉장을 대통령 직속 외곽 조직에서 찾았다. 미래기획위원회와 동반성장위원회였다. 청와대는 한 발 빠져 있는 그림이었다. 백용호 정책실장이 뒤에서 전략을 짜고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과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앞장서서 전투를 벌이는 구도였다.
경제학자의 반란
>>>변화는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에서 시작됐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전략실 관계 자는 말한다. "지난해 7월 백용호 정책실장이 내정되면서 변화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 습니다. 대기업 전략실 관계자들이라면 다들 느꼈을 겁니다. 백용호 실장이 누굽니까. 우선 경제학자죠. 경영학과 교수들이야 친기업적인 인사들이지만 경제학과 교수들은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요. 사안을 기업보단 정부나 국가 차원에서 고민하는 분들이죠. 게다가 공정거래위원장과 국세청장을 거친 인물입니다. 두 조직 모두 기업들한텐 함흥 차사 같은 기관이죠. 마인드가 다른 사람이다 이 말씀입니다. 아마 대기업 전략실 담당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백용호 실장과의 사내 인맥 정도는 점검해봤을 겁니다." 백용호 실장은 전임자인 윤진식 실장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윤진식 실장은 재경부 출신 관료였다.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친기업적인 관료가 거치는 자리다. 청와대의 정 책실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에는 서울산업대학교 총장과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을 거쳤 다. 시장에 몸담았던 관료란 얘기다. 윤진식 실장이란 존재 자체가 비즈니스 프렌들리 였다. 같은 자리에 정반대 인사를 할 때부터 이미 변화는 예고되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2010년 광복절 경축사가 신호탄이 됐다. 대통령은 갑자기 공정사 회론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은 말했다. "공정사회에서는 승자가 독식하지 않습니다." 대기업 전략실 관계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공정사회가 대기업 때리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백용호 정책실장의 구상이라는 건 알 수 있었죠. 공정 거래위원장 출신이 공정을 화두로 내세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으니까요." 하지만 대 통령의 발언 강도는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대통령이 중소기업 관련 행사에 모습을 드 러내는 일이 잦아진 것도 2010년 하반기부터였다. 대통령은 2010년 9월 13일 열린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한 조찬간담회'에선 이렇게 발언했다. "인식을 바꿔서 기업 문화를 바꿔봅시다. 아무리 총수가 그렇게 생각해도 기업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됩 니다.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이 안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대통령 의 발언이 대기업을 겨냥하고 있었어도 총수는 사정권 밖에 두고 있었다. 불과 9개월 만에 발언 수위는 임계점에 이르렀다. 2011년 5월 6일 중소기업인 초청 행사에서 대 통령은 말했다. "대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대기업 총수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청와대는 180도 바뀐 정책 기조의 선봉장을 대통령 직속 외곽 조직에서 찾았다. 미래기획위원회와 동반성장위원회였 다. 청와대는 한 발 빠져 있는 그림이었다. 백용호 정책실장이 뒤에서 전략을 짜고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과 정운찬 동반성 장위원장이 앞장서서 전투를 벌이는 구도였다. 곽승준 위원 장과 정운찬 위원장 역시 경제학자들이다.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는 말한다. "기업과 시장 중심 사고를 하기 마련 인 경영학과 교수들과 달리 경제학과 교수들은 자본주의 체 제 전체의 오류를 수정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정 부가 시장을 견제할 방법이나 기업을 견제할 합리적인 방법 을 찾는 데 골몰하곤 하지요. 시장을 해치지 않고 오류를 수 정하려면 결국 공정성이란 가치에 기대게 됩니다." 이명박 정 부 하반기의 정책 변화는 어쩌면 경제학자의 반란이라고 불 러야 할지도 모른다. 익명을 요구한 전 고위 관료는 우려했다.
"차라리 윤진식 정책실장이 있을 때가 조율이 더 잘 됐을 겁니다. 윤진식 실장은 관료 출신이니까요. 반면에 백용호 실장은 학자 출신이잖아요. 저항이 만만치가 않을 겁니 다. 정운찬이나 곽승준 카드는 그런 점에서도 고육책이었을 겁니다."
경제학자 마이어스는 총수 일가에 의해 지배됐던 패전 직전 일본 재벌 체제를 가족군주체제라고 정의했다. 지주회사 규제가 없고 출자총액에 제한이 없어서 가능했다. 지금 한국 재벌과 다를 바 없다.
동반성장과 미래기획
>>>먼저 정운찬 총리가 전장에 섰다. 정운찬 위원장은 2011년 1월 요미우리신문과 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의 광범위한 사업 확장으로 중소기업의 경영여 건이 악화돼 대중소기업 간 갈등이 생기고, 이로 인해 산업의 전반적인 효율성이 떨어 진 것도 사실입니다.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정해 대기업과의 합 리적인 역할 분담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2004년 폐지됐던 중소기업적합업 종지정제도를 부활시키겠다는 얘기였다. "대기업이 지금보다 1, 2%만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면 대중소기업 간 상생과 동반성장이 더욱 쉬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발언은 곧바로 이익공유제로 이어졌다. 정운찬 위원장이 이익공유제를 주장하고 나서자 당장 재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마저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 러냈다. 하지만 아랑곳없었다. 지난 5월 21일 더 플라자 호텔 에서 열린 '21세기경영인클럽 초청조찬간담회'에서 정운찬 위원장은 말했다. "이익공유제는 판매수입공유제와 순이익 공유제, 목표 초과이익공유제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구체적인 실행 모델들을 그 밑에 아우를 수 있습니다." 사실상 맞불을 놓는 발언이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까지 가세했다. 곽승준 위원장은 지난 4월 26일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미래와 금융정 책 토론회'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국민연금 적립액이 지난해 말 이미 324조 원입니다. 2043년이면 2,500조 원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공적연기금 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본격적으로 검토돼야 할 시점입니다." 곽승준 위원장은 일 부러 삼성전자까지 거명했다. "삼성전자는 국민연금 보유 지분이 이건희 회장보다 많습 니다. 하지만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제대로 안 됐습 니다." 포스코와 KT도 언급했다. "포스코와 KT처럼 오너십이 부족한 대기업도 방만한 사업 확장으로 주주 가치가 침해되지 않도록 감시와 견제가 필요합니다." 정운찬 위원 장의 이익공유제 발언 때보다도 더 발칵 뒤집혔다. 이익은 나누면 그만이지만 이건 결 국 경영권을 나누자는 얘기였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이렇게 비판했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는 공정사회론으로 시작된 대기업 길들이기의 정치적 파생상품 일 수 있습니다. 그 기저에는 다수를 이루는 중소기업과 소액주주의 이해를 반영하려 는 인기영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충분한 정책함량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작 이명박 대통령은 딴소리를 했다. 대통령은 지난 5월 3일 열린 경제5단체장과의 오찬 회동에서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돼야 합 니다. 법이나 제도로 강제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이미 청와대는 정운찬 위원장의 이익공유제 주장과 곽승준 위원장의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발언 직후 짜맞춘 듯 선을 그은 처지였다. 지난 4월 26일 곽승준 위원장의 연기금 자본주의 발언이 있은 직후만 해도 그랬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말했다. "평 소 학자로서 소신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논의 과정을 더 거쳐봐야 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전략실 관계자는 말한다. "그때부터 이미 짜인 각본대로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작은 대통령, 연출은 백용호 정책실장, 주연은 정운찬 위원장과 곽승준 위원장이 맡는 큰 그림이었단 거죠. 대기업들 입장에선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처럼 보입니다. 대통령은 대기업을 달래는 좋은 경찰이죠. 정운찬 위원장과 곽승준 위원장은 대기업을 때리는 나쁜 경찰입니다. 실제 밑그림을 그린 백용호 실장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죠." 그는 덧붙였 다. "여기까지는 대충 그림이 그려집니다. 끝까지 모르겠다 싶 은 건, 현 정부가 어디까지 보고 있느냔 거죠. 대기업을 상대 로 벌이는 정부의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방식이 단순히 내년 총선이나 대선을 염두엔 둔 국면 전환용 카드인 건지, 아니면 역대 정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기업을 압박해서 뭔가 협조 를 이끌어내려는 건지, 아니면 이 참에 대기업 중심으로 짜여 진 한국의 기업 환경을 뿌리째 뒤흔들어볼 참인 건지, 그걸 모르겠습니다."
최정표 교수는 말한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오염되기 시작한 건 계열사 확대를 막겠다는 애초 취지에서 벗어나서 소유지배구조 문제로 규제 폭이 확장됐을 때였습니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 장치가 재벌 총수 일가에 대한 규제 장치와 뒤섞이면서 혼탁해졌단 설명이다.
재벌의 실패
>>>"쇼입니다." 최정표 교수는 말한다 ."시끄럽기만 하지 정 작 청와대나 내각이 앞장선 정식 정부 정책도 아니지 않습 니까. 곽승준 위원장이 주장한 연기금 의결권만 해도 그래 요. 의결권을 행사하면 구체적으로 뭘 할지에 대해서는 얘기 가 없어요." 최정표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 정부의 재벌 정책 을 모두 연구했다. 국민연금은 올해 들어 주총에서 모두 130 여 건의 반대표를 던졌다. 관철된 건 단 한 건 뿐이다. 용두사 미다. 거꾸로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처럼 포장된 연기금 의결 권 행사가 정부를 옭아매는 기업의 족쇄가 될 수 있다. 박경 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연기금 주주권 행사를 찬성하는 입장이다. 논리는 친기업적이다. "연금 주주권이 활성화된다면 기업의 제품 가격 을 내리라는 등의 정부정책은 더 이상 먹혀들 수 없습니다. 정부의 지시에 따르다가 기 업가치에 손상이 온다면 경영자가 주주의 배임소송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핑계로 기업 경영자는 정부의 경영개입에 대해 '노'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건희 회장 이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혀서 진의 해석이 분분했었다. 그 무 렵 곽승준 위원장과 삼성은 물밑에서 상당한 입장 조율을 해왔던 걸로 알려졌다.
최정표 교수는 지적한다. "그것보다 이익공유제나 연기금 의결권 행사 같은 주장들 이 왜 나왔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요즘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도를 넘은 분위기죠. 외환위기 직전에 재벌들이 보여줬던 모습이죠. 특정 계열사에 재벌 일감을 몰아줘서 부 의 편법 증여까지 버젓이 하고 있죠." 최 교수는 잘라 말한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폐 지됐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출자총액제한제도부터 폐지시켰다. 인 수위원회 시절 폐지를 기정 사실화시켰다. 2009년 폐지가 확정됐다. 출자총액제한제도 는 30대 대기업이 새로운 자회사를 설립할 수 없게 만든 조항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지 주회사 규제도 없앴다. 최정표 교수는 지적한다. "패전 직전 일본 재벌도 지주회사 제도 덕분에 그렇게까지 덩치를 불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 재벌들이 걷고 있는 길입니 다." 소수 재벌이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핵심 산업을 독차지하고 나머지 중소기 업은 가내 수공업에 머물렀던 양극화된 일본 경제를 파행적 2중 구조라고 부른다. 경제 학자 마이어스는 총수 일가가 지배한 재벌 체제를 가족군주체제라고 정의했다. 지주회 사 규제가 없고 출자총액에 제한이 없어서 가능했다. 지금의 한국 재벌과 다를 바 없다.
삼성, LG, 롯데, 현대중공업, GS 등 10대 재벌의 계열사는 2008년 405개에서 2010 년 617개로 200개가 넘게 늘었다. 재벌들은 출자총액제한제도 때문에 신규 투자를 할 수 없고 자연히 고용도 늘릴 수 없다고 호소해왔다. 실제로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사라 지자마자 공격적인 신규 투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명분도 있었다. 2010년대는 신수종사업의 시대가 될 참이었다. 2010년 12월 삼성전자는 메디 슨 인수전에서 승리했다. 삼성은 헬스 케어 사업을 미래 신성 장 동력으로 보고 있었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있었다면 메 디슨을 인수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한 덕분에 대규모 투자금이 들어가는 신수종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 하면서 한국 경제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 다." 반대로 미래 시장마저도 신생 기업 대신 기존 재벌들의 몫으로 돌아간 셈일 수도 있다. 태양전지 원재료인 폴리실리 콘의 경우, 재벌들이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벌써 공급과잉 상 황에 빠져버렸다. 폴리실리콘은 1만 톤 규모의 공장을 짓는 데 8,000억 원이 넘게 드는 분야다. 외환 위기 역시 자동차 나 조선같이 되는 분야에서 재벌들이 지나치게 과당 경쟁을 벌이면서 점화됐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주요 재벌의 일자 리는 지난 3년 동안 별로 늘어나지 않았던 걸로 나타났다. 삼 성전자는 2007년 8만6,000명을 고용했다. 2010년에는 9만 5,000명을 고용했다. 계열사가 20개 가까이 늘어나는 동안 고용은 고작 1만 명 남짓 늘어났다. LG전자의 고용 인원은 같 은 기간 4,000명 불어났을 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10 대 재벌들이 계열사 늘리기에 들인 돈도 정작 자기 돈이 아 니었다. 10대 재벌의 부채 규모는 2008년 424조 원에서 2011 년 1분기 현재 629억 원으로 200조 원 이상 증가했다. 10대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줄잡아도 50조 원이 넘는다. 그런데 도 대기업들은 은행 부채로 투자에 나선 셈이다. 결국 예금 자의 돈이고 국민의 주머닛돈이었다. 부채 증가폭은 롯데그 룹이 가장 컸다. 2008년에 비해 90%가 넘게 늘어났다. 삼성 전자는 부채 규모에서도 1등이었다. 2008년 173조 원이었던 채무 규모는 2011년 1분기 현재 230조 원으로 폭증했다. 반 면에 10대 재벌 상장사의 현금 보유율은 2007년 789%에서 2010년 1,219%까지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자총액제도 의 빗장을 풀어주면 대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서 고용이 증 대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정작 재벌은 자기 돈을 아껴두고 남 의 돈으로 투자를 하면서도 일자리는 늘리지 않았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비판했다. "재벌들이 부채를 바탕 으로 규모를 늘리는 도덕적 해이에 빠진 게 아닌가 의심됩니 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은 금융 위기를 교훈 삼아서 오히려 부채를 줄이고 있는데, 유독 한국만 빚으로 기업을 확장하는 선택을 하고 있습 니다." 사실 저리 대출로 사업을 하려는 건 기업의 속성일 수 있다. 문제는 김상조 교수 가 지적한 도덕적 해이다. 10대 재벌이 보유한 부동산 총액도 2011년 들어서면서 60조 원을 넘어선 걸로 나타났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삼성그룹이 보유한 부동산의 공시지가 는 13조 원을 넘어섰다. LG그룹 역시 5조 원 규모다. 198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부 동산 광풍은 대기업들이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재기하면서 증폭된 측면이 컸다. 유사 한 상황이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벌닷컴은 10대 그룹이 보유한 부동산 공시지 가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3년 만에 두 배 이상 올랐다고 분석했다. 롯데그룹 역시 14 조 원 가까운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한 걸로 조사됐다. 롯데그룹은 이명박 정부 비즈니 스 프렌들리 정책의 직접적인 수혜자다. 제2롯데월드 인허가를 받아냈다. 숙원 사업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잠실 부동산 개발 이익까지 얻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일감 몰아주기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6촌 동생 인 구본호 범한판토스 대주주는 매년 200억 원대 배당금을 챙겨서 돈방석에 앉았다. 범한판토스는 LG그룹의 물류를 책임지는 회사다. 매출의 60%는 LG전자와 LG화학 에서 거둬들인다. 대기업에는 반드시 총수 일가가 지분을 독점한 비상장 계열사가 있 다. 이 비상장 계열사는 외부 거래보단 대기업 집단 내부 거래를 통해서만 천문학적인 이윤을 거두고 있다. 이재용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이 소유한 삼성SDS, 구본준 LG전 자 사장의 아들 구형모 씨가 지분 100%를 소유한 지흥,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 회장의 딸 신영자 사장이 지분 9.31%를 보유한 롯데후레쉬델리카,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딸 정 유경 사장이 지분 40%를 보유한 조선호텔베이커리,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 조석래 효 성그룹 회장의 세 아들 조현준, 조현문, 조현상 씨가 14.3%씩 똑같이 지분을 나눠 가진 노틸러스효성, 강덕수 STX그룹 회장의 자녀 강정연, 강경림 씨가 각각 25%씩 지분을 보유한 STX건설이 대표적이다. 식음료업체 롯데후레쉬델리카의 롯데그룹 내부 매출 비중은 97.5%에 달한다. 삼성SDS는 36.7%다. STX건설 역시 75.6%다. 지흥은 26% 다. 금융자동화기기를 제조하는 노틸러스 효성의 내부 매출은 35.4%다.
최정표 교수는 말한다. "출자총액제한제가 폐지되자 재벌이 맨 먼저 한 일은 총수가 지분 100%를 갖는 계열사를 만든 다음 기업 집단 내부거래로 부를 쌓는 일이었습니 다. 대기업 집단으로의 경제력 집중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대기업 집단 안에서도 소 수의 대주주 일가한테만 다시 경제력이 집중되는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진 겁니다. 결 국 이 돈은 장차 대기업 경영권 승계의 탄환으로 쓰이게 되는 거죠." 최정표 교수는 다 시 묻는다.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은 왜 시작된 걸까요. 이명박 정부가 출자총액제한제도 를 없애버리면서 비롯된 것들 아닌가요."
재벌 vs. 대기업
>>>지난 5월 17일 전국소상공인단체연합회는 서울청소년수련관 3층에서 MRO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MRO 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란 대기업들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사업을 말한다. 공구부터 베어링 같 은 자질구레한 소모품을 구매 대행하는 사업이다. 전형적인 소상공인 전문 분야다. 하지만 재벌들은 비용 절감을 핑계로 자사 기업 집단 내 자재 구매를 대행하는 계열사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사실 비용 절감이 아니라 이윤 독점이 목적이었다. MRO 시장 규모는 2001년 4조 원에서 2007년에는 20조 원 으로 7년 만에 5배가 껑충 뛰었다. LG그룹의 MRO 계열사 인 LG서브원은 2010년에만 2조5,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 했다. 삼성아이마켓코리아도 마찬가지다. 매출이 1조5,000억 원이었다. 전형적인 일감 몰아주기다.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사무총장은 말했다. "대기업들의 시 장 진출로 소상공인들이 피해를 호소한 지 수년이 지났습니 다. 하지만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거 리로 나서게 됐습니다. 이제는 실력행사를 통해 생존권을 지 켜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쯤 되면 패전 직전 일본에서 벌어 졌던 파행적 2중 구조와 판박이다.
애초에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한 건 대기업들에게 미래 산업에 진출할 길을 열어준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진출한 분야는 물류, 전산, 구매대행, 건설 같은 자기 거래 시 장이었다. 수십 개 계열사의 사옥을 짓고 전산 장비를 설치하 고 물건을 실어 나르고 휴지통을 사는 일을 새로운 시장이라 고 주장했단 얘기다. 그렇다고 대기업들이 신수종 사업을 등 한시했단 얘기는 아니다. 대기업들은 분명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 구분이 필요하다. 위험천만한 신규 투자를 한 건 대기 업이었다. 구멍가게 장사도 함께 한 건 재벌이었다. 구체적으 론 대기업을 여럿 거느린 총수 일가다. 대기업은 MRO 사업 에 진출하지 않아도 이윤이 나고 할 일도 많다. MRO는 아 웃소싱을 하지 않는 게 큰 기업한테는 더 효율적이다. MRO 처럼 기업 집단 내부 거래를 독점하는 구멍가게 계열사의 대 주주는 예외 없이 재벌 총수의 직계존속이다. 한화그룹의 전 산 자회사인 한화S&C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세 아들인 김동관, 김동선, 김동원 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2010년 매출은 5,000억 원이 넘는다. 역시 매출의 61.5%를 한화그룹 안에서 거둬들이고 있다.
최정표 교수는 말한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오염되기 시 작한 건 계열사 확대를 막겠다는 애초 취지에서 벗어나서 소 유지배구조 문제로 규제 폭이 확장됐을 때였습니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 장치가 재벌 총수 일가에 대한 규제 장치와 뒤섞이면서 혼탁해졌단 설명 이다. 마찬가지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효과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도 계열사 확대 과정에서 끼어드는 재벌 총수 일가의 사리사욕이다. 그리고 재벌에 대한 비판이 일어 날 때마다 대기업의 자유로운 사업 확장이라는 논리로 맞선다. 애초에 대기업과 재벌 을 분리 규제하지 못한 게 문제란 얘기다.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은 다르다. 삼성전자는 2010년대를 선도할 신수종 사업 진출을 위해 계열사를 늘릴 필요가 있다. 메디슨을 인수해야 헬스 케어 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 삼성그룹은 다르다. 삼성아이마켓코리아 나 삼성SDS는 재벌이 재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원이 될 뿐이다. 대기업 은 기업이고 재벌은 개인이다. 기업은 키우고 개인은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최정표 교수 는 말한다. "재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습니다. 대기업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실제론 재벌 치부에 방해 가 돼서였죠."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기업집단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한다. 기업집단법은 사실상 개 인으로 남은 재벌을 기업이라는 실체가 있는 조직으로 만들자는 얘기다. 삼성그룹의 두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 소속 직원들은 대부분 월급을 계열사에서 받는다. 명목 상으로 계열사 소속이기 때문이다. 미래전략실은 실체가 없는 조직이란 얘기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결정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런 실체가 없는 조직을 통해 실체가 없는 재벌이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을 움직인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애초에 대기업 규 제책이었다. 반면에 재벌 규제책은 마련되지 못한 채 나중에 출자총액제한제도에 정책 목표를 덧붙이는 식으로 땜질을 하면서 대기업 규제책 자체가 오염됐다. 지금은 대기업 의 투자 활성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빗장을 하나 열었으면 다른 빗장을 하나는 걸어야 한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행보도 결국 대기업과 재벌을 구분하는 투 트랙 방식 이다. 각종 검찰 조사와 연기금 의결권 행사로는 재벌을 압박하고 동반성장 정책으론 대기업을 압박하는 식이다. 비판의 여지는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나 기업집단법 같은 법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다. 재벌을 직접 건드리지 못하니까 꺼내든 미봉책이다.
정부의 자업자득
>>>지난 4월 11일 개정 상법이 국회 본회의를 전격 통과했다. 개정 상법은 이명박 정부가 2008년 10월에 발의한 내용이 다. 국회를 통과한 최종안에는 결국 상법 398조에 자기거래 승인대상을 확대하고 상법 397조 2항에 회사기회유용금지 조항을 신설했다. 기존 상법에서는 등기 이사가 CEO로 되 어 있는 기업과 거래할 때는 이사회의 결의를 얻도록 돼 있었 다. 개정 상법은 훨씬 강화됐다. 등기 이사의 배우자나 자녀 가 CEO로 있는 회사, 배우자나 자녀가 10%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회사와의 거래에선 이사회 결의를 반드시 얻도록 규정했다. 또 회사기회유용금지조항에 따라 대주주나 CEO의 가족은 앞으로 이사회 승인 없이 기업의 사업 기회를 이용 할 수 없게 됐다. 삼성SDS, 노틸러스효성, 한화S&C, STX건 설, 롯데후레쉬델리카, 범한판토스 같은 기회 유용 사례가 생 겨날 여지를 틀어막은 셈이다. 사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 지하면서 예상됐던 문제들을 예방하려고 마련한 규제가 개 정 상법인 셈이다. 개정 상법이 겨냥하는 건 대기업이 아니라 재벌이다. 하지만 너무 늦게 도입됐다. 이미 재벌의 사업 기회 유용은 유용될 만큼 유용됐다. 퍼질 만큼 퍼졌다. 아예 관행 화된 상태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풀어버리자 이 정부 들어서 기업 상속을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기업 상속의 방법이란 게 결국 비상장 계 열사를 세워서 일감 몰아주기로 부를 세습한 다음 그 돈으로 기업 집단의 경영권까지 잇게 하는 거였다. 뒤늦게 개정 상법으로 차단에 나선 셈이다. 개정 상법은 곽승준 위 원장의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와 한 짝이다. 개정 상법은 범한판토스 같은 회사와 LG 전자가 거래하려면 이사회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LG전자에 국민연금 이사 가 있어서 반대한다면 가장 큰 골칫거리인 일감 몰아주기를 견제할 수도 있다. 정유사 나 통신사에 대한 가격 인하 압박도 정부가 애호하는 정책 수단이다. 윤증현 전 기획 재정부 장관이나 임태희 대통령실장, 김대기 청와대 경제수석,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 김석동 금융위원회 위원장,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모두 기획재정부 출신이다. 모두 금융 관치에 익숙한 관료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물가 인하를 기업 압박으로 해결하려 는 해법을 찾게 된 배경일 수 있다. 금융 관치처럼 산업 관치도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 이다. 이것도 개정 상법과 닮은꼴이다. 크게는 다 풀어준 다음 각개 전투로 때려잡아서 문제를 해결하겠단 전략이다.
재벌을 다루는 이명박 정부 정책 방향이 도무지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다. 재계 의 저항도 거세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렇게 비판했다. "이사와 주 요 주주의 직계존비속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모든 국민은 자신의 행위가 아 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아니 한다'는 헌법 제13조의 연좌제 금지 원칙과 달라서 위헌소지마저 있습니다." 거센 반발에 마모되다 보면 개정 상법이 든 이익공유제든 연기금 의결권 행사든 용두사미로 끝날 수 있다. 최정표 교수는 말한 다. "역사상 재벌 정책이 가장 강했던 때는 역설적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이었어요." 아 직 정부의 힘이 막강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인데다 민주화 훈풍까지 불어서 재벌 규 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이명 박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나 지주회사법 규제 같은 법적 장치를 해제시킨 뒤 정부와 기업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방식을 선택했다.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맨주먹으로 싸우 기를 선택했다. 자승자박이다.
이명박 정부는 일단 지난 6월 12일 한나라당에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 과세안을 골 자로 한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을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익공유제와 연기금 의결권이 외곽 때리기 정도였다면 이번 과세안은 정밀 타격쯤 된다. 이미 지난 3월 31일 대통령 주재로 2차 공정사회 추진회의가 열렸을 때 논의됐던 사안이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 전담반도 결성됐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안은 대기업 계열사에 일감을 대량으로 몰아줘서 과다 이익을 챙겼을 경우 과세를 추진하는 방안이 골자다. 심지어 물량 몰아 주기를 통해 계열사 주식 가치가 올라갔을 경우 주식 가치 증가분에 대해서도 과세하 는 방안까지 담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 C&C가 상장되면서 3조 원의 시세 차익을 얻은 적이 있다. SK C&C의 내부 거래 비중은 60%가 넘는다. 이명박 정부의 일 감 몰아주기 과세안이 구체화되면 재벌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기는 일 자체가 불가 능해진다. 맨 먼저 삼성SDS가 정조준 대상이다. SK C&C처럼 그룹 전산 업무를 담당 하는 회사인데다 비상장 법인이기 때문이다. 삼성SDS의 내 부 거래 규모 역시 60%가 넘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 자승자박 싸움에는 승산이 없을 거라는 비관론도 깊다. 얼마 전 자유기업원은 18대 국 회의원에 대한 친시장성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기 업 천국인 미국에선 흔한 일이지만, 한국에선 권위주의 정권 시절 안기부나 보안사가 하던 일이다. 대기업 집단은 이미 정 치인의 이념 성향을 상시 감시할 만큼 막강해졌다. 권혁철 자유기업원 시장경제실장은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안보 등 을 제외하고 경제 이념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엔 보수 정 당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 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정부가 기업의 상속 에 대해 정당하게 과세한다는 일관된 자세를 보였어야 했어 요. 초창기 기업 프렌들리로 다 풀어주고 나서 이제 일감 몰 아주기 등을 과세하겠다고 합니다. 일회성 기 싸움으로는 정 부가 성과를 얻기 힘들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레임덕에 들어 가서 재벌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조선일보 송 희영 논설주간은 4월 8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5년 짜리 권력과 재벌 간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한쪽은 유통기 한이 채 2년 남지 않은 유한권력이고 다른 쪽은 대를 이어 세습하는 무한권력이다. 어느 정권도 재벌 길들이기에 성공 한 적이 없다."
정부의 패배
>>>지난 4월 발표된 대기업들의 1분기 영업 실적은 참담했다. 2010년 사상 최대 매출과 사상 최대 순이익을 기록했던 삼성 전자는 영업이익이 2010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서 반 토막이 나버렸다. LG디스플레이는 아예 적자였다. 환율이 오른 탓이 다. 이명박 정부는 사실상 고환율 정책을 통해 대기업들의 수 익을 올려줬다. 고스란히 가계 부문과 정부 부문의 부담이 됐 다. 이젠 저환율 기조다. 올 것이 왔다. 동반성장 같은 구호나 연기금 자본주의 같은 공갈보다도 이익을 빼앗길 때 기업은 정부를 두려워하게 된다. 재벌들은 이미 정부의 동반성장 정 책에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 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관계자는 말한다. "삼성전자라면 순 익 1,000억 원 정도는 가볍게 합법적으로 조정이 가능합니다. 회계 기준에 따라 늘고 주는 게 순익이니까요. 그런 삼성전자가 왜 1분기에 갑자기 절반 뚝 잘린 영업이익 수치를 발표했을까요. 정부에 대한 시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겁 니다." 실제로 2010년 1분기 환율은 달러당 1,144원이었다. 2011년 1분기 환율은 달러 당 1,120원이었다. 24원 차이였단 얘기다. 반면에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2조 원이 넘 게 줄어들었다.
치킨 게임이다. 한국 경제의 수출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는 43.64%에 달한다. 일본 은 10.71%다. 수출 대기업의 실적이 곧 한국 경제의 GDP로 직결된단 얘기다. 경제성장 률에 목을 매는 정부로선 수출 기업의 실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미 한국 경제는 저성장 국면이 접어든 지 오랜데도 집권 정부는 늘 성장률 수치에 목을 맨다. 이 명박 정부 역시 7% 경제성장률을 공약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정부 스스로 기업에 얽매 이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성장률이 높아도 국민을 위한 고용이나 수익과 직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정부 입장에서도 실체 없는 성장에 불과하다. 정치적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인의 실질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지난 1분기 국 내 총생산은 늘었는데, 실질 국내총소득을 나타내는 GDI는 줄었다. GDI가 줄었다는 건 실질 구매력이 약화됐단 뜻이다. 김영배 한국은행 경제통계국장이 설명했다. "GDP 측면에서 한국경제는 적절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역조건 악화로 GDI 가 감소해서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좋지 않습니다." 정부 입장에선 때려서라도 재벌과 대기업한테서 얻을 건 얻어야 한다.
사실 수출 대기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에서 기업의 이익을 확산시키는 문제는 모 든 집권 정부의 숙제였다. 노무현 정부는 기업을 쥐었다 폈고, 이명박 정부는 기업을 펴 줬다가 쥐고 있다.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었다. 일본 경제 저널리스트인 미쓰하시 다카 아키는 '부자 삼성 가난한 한국'에서 이렇게 썼다. "이명박 대통령의 원화 약세 정책은 확실히 대기업 수출에 막대한 효과를 불렀다. 이를 통해 세계 경제사에 드물 정도로 한국 글로벌 기업의 역량은 급신장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승리해야 한다 고 강요당하는 한국의 대기업은 그리 쉽게 한국 국민들에게 과실을 나눠줄 수가 없다." 김종석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장했다. "정부가 친기업, 친시장, 고환율 정책으로 대 기업을 도와주었는데 왜 대기업들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보답하지 않느냐고 괘씸하 고 섭섭하게 생각한다면 기업의 본질을 모르는 순진한 정부입니다. 정부와 기업의 관계 는 그렇게 주고받는 관계도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기업은 정부가 만든 제도와 기업 환경에 적응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조직일 뿐입니다. 정부는 제도를 통 해 기업의 행동변화를 유도해서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원칙이죠." 레임덕 이명박 정부한텐 뼈아픈 충고다.
한국 사회는 이미 기업 사회로 접어들었다. 기업을 키우고 기업을 다루는 게 정치의 핵심이 됐다. 기업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기업 문화는 한국 사회를 뿌리째 바꿔놓았다.
대기업의 성공
>>>한국 사회는 이미 기업 사회로 접어들었다. 기업을 키우고 기업을 다루는 게 정치의 핵심이 됐다. 기업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기업 문화는 한국 사회를 뿌리째 바꿔놓았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사회가 기업 논리로 재조직되면서 인류가 수천 년간 공유해온 도덕의 개념까지 바꿔놓고 있다." 김난도 서울 대 소비자학과 교수도 주장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기업혁명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업혁명이 가져온 우리 사회의 큰 변화 중 하나는 깨끗한 사 회로의 진입입니다. 기업혁명은 또 사회 곳곳에 능력 위주, 실 력 위주의 인재선발 방식을 확산시켰습니다. 물론 기업 혁명이 드리우는 그림자 또한 무시해선 안 됩니다. 경쟁력과 효율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때론 공공의식의 실종으로 이어져 사회 를 더욱 각박하게 만듭니다." 그는 덧붙였다. "문제는 기업혁명 으로 힘과 영역이 위축된 정치가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 해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 싸움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냐 기업 때리기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란 기업 사회를 앞으로 어떻게 끌고 갈지의 문제다.
LG화학과 LG카드의 사례처럼 대기업과 재벌은 샴쌍둥이 처럼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한국 경제의 장래 먹을거리를 앞 장서 수색하는 위험부담을 떠안기도 하지만, 서민경제를 파 탄에 몰아넣고도 발부터 빼는 파렴치한 행태도 동시에 보인 다. 그때마다 재벌들은 대기업의 성공 신화 뒤에 치부를 숨겨 왔다. 재벌 총수들은 대기업의 이윤만 독점한 게 아니라 성공 신화까지도 독점한 셈이다.
일본 기업 혼다의 사장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해서 국가 에 세금을 많이 납부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선 대기업들이 줄 기차게 법인세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업의 목적 은 단지 자기 이익 실현일 뿐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 후카가 와 유키고 교수는 썼다. "통화 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으로 한 국 기업은 극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한 기업이 위대한 기업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제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지분 관계나 세금 납부뿐만 아니라, 2010년 2월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입고 나타난 지암바티스타 발 리 코트의 상표와 가격에도 관심을 갖는다. 재벌은 개인이지 만 공인이 돼버렸단 뜻이다. 정작 재벌은 공공의 책임은 거부 한 채 시장의 권리만 요구하고 있다. 재벌의 공공의식 실종은 정치의 개입을 불렀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결자해지는 그런 격변과 갈등의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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