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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로 간 오비츠

OVITZ DOES SILICON VALLEY<br>한때 마이클 오비츠 Michael Ovitz는 할리우드를 지배했다. 그러나 갑자기 사라졌다. 현재 그는 기술 회사 자문역을 맡으며 서서히 무대 위로 돌아오고 있다.

by David A. Kaplan
Illustration by Daniel Adel

샌프란시스코의 사업가인 31세의 피터 슐체스키 Peter Szulczewski는 전도유망한 사업을 시작했다. ‘흥미로워 진 쇼핑’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건 모바일 앱 ‘위시 Wish’는 물건을 구매하려는 고객들이 만든 개인적인 ‘위시리스트’를 위시에 참여하는 소매업자들과 연결한다. 초록색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사고 싶은가? 위시는 당신과 어울리는 제품을 가진 상점과 연결해준다. 현재 1,500만 명의 사용자가 등록돼 있고, 하루에 5만 명씩 사용자가 늘고 있다. 하지만 슐체스키가 위시를 시작한 2011년에는 정체성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콘텍스트로직 ContextLogic이라는 특징 없는 이름을 사용했다. 베타 웹사이트의 주소 wishwall.me는 잊혀지기 쉬웠다. 또 Wish.com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 후 지난해 슐체스키는 특이한 자문역을 소개받았다. 한 때 LA 최고의 에이전트였던 66세의 마이클 오비츠였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오비츠는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는 미소?호전적 성향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로 할리우드를 평정했다. 그러나 명백한 배신과 도를 넘은 경쟁이 계속되면서 ‘왕좌’에서 물러났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오비츠는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사업 친구를 만들고, 여러가지 투자 도박을 하고 있다. 캐시미어 스웨터와 아르마니 블레이저를 입은 오비츠는 실리콘밸리의 드레스 코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슐체스키는 만나자마자 서로 마음에 들어 했다. 오비츠가 톰 크루즈, 마돈나와 맺었던 엄청난 규모의 계약과 비교하면 슐체스키에게 건넨 조언은 무척 소박했다. 오비츠는 우선 도메인 이름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슐체스키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고, 자신이 가진 방대한 인맥(Rolodex) *역주: 회전식 명함 정리기을 동원해 몇 주 만에 wish.com의 주인을 찾아냈다. 주인은 배리 딜러 Barry Diller가 운영하는 IAC그룹의 프랑스 자회사였다. 슐체스키는 실제 협상을 이끌었으나?협상 가격을 밝히지는 않았다?협상 전에 오비츠와 전략에 대해 실전 연습을 했다.

슐체스키는 크게 감동했다. 그는 “마이클은 이곳에 자주 온다. 우리는 그를 정확히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오비츠는 그저 기술업계의 차세대 스타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당연히 한몫을 챙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대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비츠는 언제나 소극적인 접근방법을 택하고 중개인을 통하기도 한다. 그가 풍미했던 시대의 위대한 할리우드 에이전트들은 대개 이런 방법을 택했다.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에 따르면, 오비츠는 위시에서 연봉을 낮췄다(슐체스키는 상대방을 배려해 이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슐체스키는 오비츠의 열혈 팬이다).

오비츠가 부활하면서 실리콘밸리에서 그로부터 이와 비슷한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온다. 하지만 시끄러운 연예 사업과는 관련이 없는 사례들이다. 오비츠는 벤처 캐피털 회사 앤드리슨 호로비츠 Andreessen Horowitz(이하 AH)의 사내 멘토로 일하면서, 어떻게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에이전시 Creative Artists Agency(이하 CAA)처럼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을 만들 수 있는지 조언한다.

CAA는 오비츠가 1975년 설립하고, 1995년까지 경영한 할리우드의 대형 연예 기획사다. 1999년부터 오비츠와 알고 지낸 마크 앤드리슨 Marc Andreessen은 “마이클은 실리콘밸리가 좋아하는 기업가의 전형이다. 그는 매우 적극적이고 혁신적이다”라고 말했다. “마이클은 우리 회사의 든든한 친구다. 그는 곁에 두기에 좋은 친구다.” AH가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마이클은 또한 AH의 투자자다. 앤드리슨은 예전에 마이클을 또 다른 벤처 투자자이자 페이팔의 공동 설립자인 피터 시엘 Peter Thiel에게 소개한 바 있다. 시엘은 급성장하는 데이터 분석 회사 팔란티르 테크놀로지스 Palantir Technologies(CIA 같은 정보 기관이 고객이다)의 회장이다. 시엘은 “마이클은 미국의 어떤 CEO든 만나게 해줄 수 있다. 실리콘밸리는 지나치게 고립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뉴욕과 LA 등지에 다방면으로 인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오비츠에겐 일을 빨리 배우고 이를 바깥 세계로 전달하는 비상한 능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오비츠가 9년 전 설립한 팔란티르가 정부 기관 이외의 고객을 확보하도록 도운 것이 시엘이 말한 것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팔란티르는 헤지펀드와 기타 금융기업에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했지만 특별히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시엘은 엔지니어들의 믿음과 달리 “제품이 저절로 팔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1990년대 말 닷컴 거품이 터지면서 밸리의 너무 많은 신생 기업들이 ‘긴축’에 돌입했고, 다른 기업과 기관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게 됐다. 시엘이 “아무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맥을 가진 오비츠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그러한 경향을 극복하는 방법이 되었다. 현재 오비츠는 팔란티르의 투자자다.

그의 영향력은 어느 곳에나 미친다. 로봇공학 기업 안키 Anki의 CEO는 오비츠가 언젠가 밤 늦게, 회사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심리적 변화에 대해 조언했다고 말했다. 오비츠는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Mark Zuckerberg 같은 고객을 가진 개인 자산 관리회사 아이코닉 캐피털 Iconiq Capital(언론 노출을 꺼리는 기업이다)에 관심을 보였다. 자금력이 풍부한 신생 벤처 캐피털 펀드 포메이션8-아시아에 집중 투자한다-에선 새 투자 파트너에게 어떻게 이미지를 구축하고 월가 고객을 유치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포메이션8의 젊은 파트너 중 한 명인 조 론스데일 Joe Lonsdale 은 “마이클은 월가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는 월가에 도움을 청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때 오비츠는 스텔스 모드 *역주: 회사가 일시적으로 비공개인 상태에 있었던 포메이션 8의 포트폴리오 회사 이름도 제안했다. 그가 생각한 이름은 스텔스였다. 시엘을 통해 오비츠를 만난 론스데일은 그를 슐체스키에게 소개해 주었다.

오비츠는 스카이프의 사장 토니 베이츠 Tony Bates, 숙소 공유 네트워크 에어비앤비의 CEO 브라이언 체스키 Brian Chesky 등 기술업계 유명인사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오비츠는 그들에게 문화와 스토리텔링을 가르친다. 이들이 혹시라도 의심을 품으면 마이클은 비벌리힐스에 위치한 2만 8,000㎡(약 8,470평) 규모의 자택에 초대해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엄선된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비츠는 스카이프의 베이츠를 위해 심지어 웨스트 LA에 있는 자신이 운영하는 일식집 하마사쿠 Hamasaku의 특별한 20달러짜리 연어 도미 롤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오비츠를 앤드리슨에게 소개한 실리콘밸리의 열성 엔젤투자자 론 콘웨이 Ron Conway는 “그가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고 평했다.

그의 열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밸리의 많은 사람들은 오비츠가 밸리에 있다는 사실 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눈 한 벤처 투자자는 “몇 년 전 사라진 사람을 말하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샌프란시스코의 세인트 레지스에 아파트를 샀다고 들었다”(오비츠는 정말로 아파트를 샀다)며 유익한 정보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오비츠가 밸리에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왜 그가 외딴 곳을 택했고,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하는지를 궁금해한다. 이 ‘이중 심리극’은 오비츠가 실제로 하는 일만큼이나 흥미롭다.

70세가 다 돼가고 수억 달러의 순자산과 ‘일루전 Illusion’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모터요트?길이가 184피트(약 56m)나 된다?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보통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다. 오비츠는 맨해튼에서 지미 추 Jimmy Choo의 공동 설립자인 타마라 멜런 Tamara Mellon과 사귀기 시작했고, 다양한 자선활동도 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최근 밸리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불미스러운 과거 이야기가 다시 대두될 위험에도 처해 있다.

보통 의심이 많고 증거를 중시하는 괴짜들도 오비츠와의 관계에선 평소답지 않게 사우스랜드 Southland에서 온 새로운 협력자에 매혹된다. 시엘은 “나는 라이벌이 상대방에게 한 나쁜 말을 무시하는 것을 배웠다. 오비츠에 대해 라이벌이 아닌 사람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비츠에게 당했다”는 무시해야 할 이야기는 여전히 엄청나게 많다. 시엘은 1997년 오비츠가 한때 CAA를 공동 설립한 친구였던 론 마이어 Ron Meyer와 화해를 시도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마이어는 토요일에 오비츠와 브런치를 함께하며 분양 받을 예정인 말리부의 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다음 월요일에 그가 선수를 쳐서 부지를 매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비츠는 공격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이 이야기에 대해 포춘에 밝히기를 거절했다. 자신의 아픈 허리와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고객들이 무대를 지배해야 한다’는 견해를 그 이유로 들었다. 그는 이후 그들에게도 협조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수십 명의 친구들과 적들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그에 대해 여전히 갖고 있는 존경과 두려움이다. 오비츠는 게임에서 다시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사로잡혀 누군가 다음처럼 묻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오비츠가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마이클 오비츠는 오랫동안 극단적인 의견충돌의 근원이었다. 그가 LA에서 군림한 오랜 기간 동안 몇몇은 그를 좋아했고, 몇몇은 그를 꺼렸다. 오비츠가 대변한 고객들에게 그는 비할 데 없이 뛰어난 ‘협상가’였다. 반면 그가 패배시킨 적들에게 그는 사람을 잘 다루는 ‘악당’이었다. 맨해튼의 투자은행에 근무하는 허버트 앨런 주니어 Herbert Allen Jr.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부분 다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비츠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비츠가 한때 할리우드를 지배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에이전트, 거래자, 법률 고문, 유력 인사들에게 그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액션’이 있는 곳을 좋아하면서도 약간 물러서 있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오비츠는 오래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투어 가이드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69년 UCLA 졸업 후에 그는 수습직원으론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 바로 권모술수가 판치는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 William Morris Agency의 우편물실이었다. 1997년 쓴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자신만만하고 호기심이 많고 반은 미쳐 있었다. 동료들이 우편물을 배달하러 나가거나 책임자들이 저녁 먹으러 나간 동안 그는 우편물을 읽고 계약과 문서를 살펴봤다.

8개월이 지나 그는 TV 부서의 에이전트가 됐다. 6년 후 그는 4명의 동료와 힘을 합쳐 CAA를 만들었다. 5명의 파트너는 모두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재규어를 구입했다. 그 후 20년간 CAA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고, 다른 에이전시에서 폴 뉴먼과 더스틴 호프먼 같은 스타들을 영입했다. 오비츠는 자신의 에이전시를 단순한 스튜디오 이상으로 만들었다. 다른 연예 기획사가 배우나 시나리오 작가들을 대변해 일을 한 반면 CAA는 연예인들을 독점해 고객들에게 일괄 제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비츠는 에이전트 역할을 완전히 초월했다. 소니와 마쓰시타 전기가 각각 24억 달러, 66억 달러를 들여 콜롬비아 픽처스 Columbia Pictures와 MCA를 인수할 때, 그는 다국적 투자 은행가로 활약했다. 1991년 당시 오비츠가 백악관에 눈독을 들일 수도 있다는 터무니없는 기사가 뉴요커 New Yorker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영향력을 보이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았다.

권력을 가진 오비츠는 적을 만들기도 했다. NBC의 경영자 돈 오마이어 Don Ohlmeyer가 그를 “반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부른 일화는 유명하다. 데이비드 게펜 David Geffen은 이를 듣고 “돈 오마이어는 나보다 마이크 오비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 술 더 뜨기도 했다.

결국 태양에 너무 가깝게 다가간 오비츠는 1995년 자신이 만든 기획사를 떠났다. 이어 CAA보다 매출이 100배 이상 큰 상장기업 디즈니에서 마이클 아이스너 Michael Eisner 바로 밑의 자리에 앉았다. 그와 아이스너는 친한 사이였지만 디즈니에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오비츠는 이별 선물로 1억 4,000만 달러를 받고 15개월 만에 디즈니와 작별했다. 아이스너(곰인형 같은 인물은 아니다)는 오비츠에게 보낸 해고 통지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당신이 너무 많은 잔꾀를 부리고 지나치게 진실을 왜곡했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부정직했던 시절은 끝났다고 말했지만 결국 나를 속였다’고 비판했다.

1999년 오비츠는 대표 업무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히 에이전트가 아니라 매니저로서였다. 때문에 콘텐츠를 만들고 이익 분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가 설립한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그룹 Artists Management Group(이하 AMG)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업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비츠의 거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할리우드의 다른 에이전트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 에이전트는 “왜 회사를 옮겨야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오비츠는 “나는 피카소의 작품을 갖고 있지만 당신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AMG는 엄청난 실패작이었다. TV 부문에서 자금유치가 이뤄지지 않은 영향이 컸다. 소식통에 의하면 오비츠는 이 투자에서 1억 달러 이상을 잃었다. 그는 불명예를 잘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2002년 AMG의 핵심 자산을 매각하고 몇 개월 후, 회사가 게펜이 이끄는 ‘게이 마피아’ 때문에 붕괴됐다고 비난했다. 훗날 사과를 하긴 했지만 이 발언은 널리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비츠는 미개척의 전문 분야로 돌아가 투자, 이사진 업무, 예술품 수집, 자선사업에 집중했다. 그에겐 피카소 같은 작품을 갖고 있을 만큼 충분히 돈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비츠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의 도피를 고소해 했다.

오비츠는 론 콘웨이를 통해 1999년 실리콘밸리와 첫 인연을 맺었을 때도, 여전히 LA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막 AMG를 시작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기술업계에서 풋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4년 전 CAA에서 지역 전화 회사들과 함께 초기의 주문형 비디오시스템인 텔레-TV를 설립한 바 있다(당시 하워드 스트링어 Howard Stringer가 CBS를 떠나 CEO로 합류했다). 그러나 텔레-TV는 CAA와 인텔의 ‘멀티미디어 랩’ 공동 프로젝트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미래에 대한 오비츠의 직감은 아주 정확했다.

콘웨이는 오비츠에게 실리콘밸리에 뛰어들라고 재촉했다. 콘웨이는 그에게 “흥분을 느껴보고 싶으면 실리콘밸리에 와서 경험해보라”고 권했다. 그가 오비츠를 앤드리슨에게 소개하자 둘은 금방 친해졌다. 오비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앤드리슨이 가장 최근에 설립한 회사 라우드클라우드 Loudcloud의 이사진에도 합류했다. 앤드리슨이 “그를 보러 LA에 있는 그의 집에 갔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기술업계 출신이 아닌 사람 가운데 처음으로 쌍방향 TV의 미래를 알아차리고 이해했다.”

2002년 AMG가 실패하면서 오비츠는 밸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세인트 레지스에 부지를 마련했다. 요즘 오비츠는 보통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책상 앞에 앉아 채용, 승진, 사업 개발에 관한 조언을 해주면서 일주일의 대부분을 밸리에서 보낸다. 몇 년 전 그와 앤드리슨은 투자자, 기업가, 친구들 앞에서 철학에 대해 거의 한 시간 동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동영상은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동의하에 인터넷에 게시됐다. 이 동영상에 나오는 똑똑하고, 사근사근하고, 매력적인 모습이 진짜 오비츠였다. 그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할리우드 세계와 완전히 다른 밸리의 ‘협업 전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나이에서 교훈을 얻은 오비츠는 심지어 과거 실수에 대해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우리의 경쟁이 지나쳤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말을 무마하는 편리한 수식어도 붙였다. “인간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화낼 방법을 찾는다.

웨스트 LA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오비츠의 예전 동료는 동영상을 본 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친구에게 “믿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가 마크앤드리슨을 설득한 것 같다!” 할리우드 ‘어둠의 마왕’이 변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의심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오비츠와 경쟁했던 LA의 한 기업가는 “마이클은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세일즈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부분은 그가 80%만 맞는다는 점이다.” 과거로 부터 도피하려는 오비츠가 언제나 “과거는 서막”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가 “CAA 경험 덕분에 실리콘밸리와 관계를 맺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전문가들은 이를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의 사업 수완이라고 여긴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순진한 사람들이 ‘개인숭배’에 휩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테디 포르스트만 Teddy Forstmann 이야기 말고 더 알 필요가 있나?”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는 오비츠가 약 2년 전 사모펀드의 개척자이자 IMG의 소유주인 친구 포르스트만이 뇌암으로 투병하는 동안 스포츠 미디어 기업 IMG를 빼앗으려고 했다는 소문을 말하는 것이다(오비츠는 거 듭된 요청에도 답변을 거절했다).

오비츠와 새로 친하게 지내는 앤드리슨 같은 사람들도 이러한 회의론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다소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앤드리슨은 오비츠를 불신하는 사람들을 가장 무시하는 태도로 대한다. 그는 오비츠의 평판이 개인적인 잘못이라기보단 할리우드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앤드리슨은 “실리콘밸리는 이런 유형의 사람에 익숙하다. 스티브 잡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내 경력도 그렇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는 실리콘밸리와 LA의 문화적 차이다.” 앤드리슨은 인텔의 앤디 그로브 Andy Grove나 넷스케이프의 짐 클라크 Jim Clark가 할리우드에서 유명해졌다면 오비츠처럼 악당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시의 피터 슐체스키는 “사람들이 내게 경고한 일을 겪지 못했다”고 말한다. 포메이션8의 론스데일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사람들은 오비츠의 이력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조심스러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가시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가치를 입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잘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 결정하기는 어렵다.” 포메이션 8의 규정에 따르면, 오비츠는 ‘500만 달러 이하’의 ‘소규모’ 투자를 하는 유한 책임사원이다.

소프먼은 오비츠가 안키에 지분이 없으며 자문료도 받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어쩌면 그저 오비츠가 아직 자문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소프먼의 주장처럼 오비츠가 정말 돈 이상의 것을 위해 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막 30세가 된 소프먼은 “나와 오비츠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정말로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오비츠는 달성하기 어렵더라도 더 지속가능한 무언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개인적인 ‘구원’이다. 언제나 과거 실패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밸리는 오비츠 이전에도 그곳에 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다. 할리우드에서 쫓겨났고, 월가의 금융인도 아니고, 매디슨 애비뉴 Madison Avenue *역주: 미국 광고업계를 상징하는 거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도 없는 그는 실리콘 밸리를 ‘마이클 오비츠’로 다시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밸리는 오비츠가 소망하는 바를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밝히고 싶은 사실: 필자의 장남인 데이비드 A. 캐플런 David A. Kaplan은 작년 겨울 에어비앤비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마이클 오비츠는…

1946년 시카고에서 탄생.

1969년 LA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의 우편물 실에서 근무.

1975년 할리우드 대형 연예 기획사로 성장한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에이전시를 공동 설립.

1995년 CAA를 떠나 디즈니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의 바로 밑 자리인 사장으로 이직.

1997년 ‘작별 수당’으로 1억 4,000만 달러를 받고 아이스너에게 해고당함.

1999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그룹 설립.

1999년 엔젤 투자자 론 콘웨이 소개로 실리콘밸리와 인연.

2002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그룹 매각.

2010년 마크 앤드리슨의 벤처 캐피털 회사에서 유명한 비밀 회담을 하며 투자자, 기업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철학과 인생에 대해 말함. 실리콘밸리에서 부상하는 계기 마련.

2013년 ART뉴스가 뽑는 세계 최고 미술품 수집가 200인에 선정됨. 피카소, 로스코, 데 쿠닝 등의 작품 보유.


“마이클은 실리콘밸리가 좋아하는 기업가의 전형이다. 그는 매우 적극적이고 혁신적이다” -마크 앤드리슨
“사람들이 (마이클에 대해) 내게 경고한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피터 슐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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