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페니 프리츠커의 매력적인 삶(아직까지는)

The Fascinating Life of Penny Pritzker(So Far)

비극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부터 집안싸움까지, 하얏트 호텔의 상속녀 페니 프리츠커 Penny Pritzker는 언제나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BY NINA EASTON


미 상무부에 상정된 2015회계연도 예산 88억 달러
산하기관 12개
직원 4만7,000명
페니의 순자산 24억 달러

미국상무부 장관 페니 프리츠커가 올해 초 실리콘밸리를 첫 공식 방문했을 때, 그녀는 페이스북 본사(미국 캘리포니아 주 멘로 파크 Menlo Park 소재)의 바람이 잘 통하는 오픈 플랜 open-plan *주석: 다양한 용도를 위해 칸막이를 최소한으로 줄인 건축 디자인 사무실에 특히 주목했다. 이 사무실에는 유리로 된 회의실이 있는데, CEO 마크 저커버그 Mark Zuckerberg가 종종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한다. 반면 그녀는 1932년 지은 상무부 본사 허버트 C. 후버 빌딩 Herbert C. Hoover Building이 마치 “토끼 굴 같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프리츠커는 상무부 사무실이 “너무 폐쇄적”이라고 지적했다. “만약 정보가 돈이라면, 직접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이 싫다.”

페니는 좀더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오바마 내각이 아닌 저커버그와 더 공통점이 많다. 실리콘밸리 엘리트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녀도 어마어마한 부자(순자산이 약 24억 달러로 추정된다)에 익스트림 스포츠 광팬이자 본인 이름으로 10개 이상의 회사를 설립한 기업가다. 그녀는 “기업을 세우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며 “정말 멋진 일이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페니의 배경은 변호사와 로비스트, 그리고 정치인이 대부분이었던 상무부 전임자들과 차별화된다. 하지만 지난해 페니를 임명한 것은 아주 잘한 일로 평가 받고 있다. 자선가이자 시민 운동가이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의 일원인 페니는 자신의 섬세함과 설득력을 총동원해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한 상원의원을 도왔다. 그는 페니 덕분에 수백만 달러를 모금해 2008년 대통령 경선에서 클린턴 진영에 맞설 수 있었다. 2012년 그녀는 오바마 지지단체 오바마 포 아메리카 Obama for America의 공동 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이는 미 정치계의 최상위 계층이 된 페니 프리츠커 이야기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녀가 가장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차례 이뤄진 페니와의 대화와, 그녀의 사촌 토머스 Thomas와 니컬러스 프리츠커 Nicholas Pritzker가 단독 인터뷰를 통해 가족의 침묵을 깨고 들려준 속 깊은 이야기 덕분에 그녀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것을 극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문가의 딸이지만, 페니는 비극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그녀는 페이스북 본사에서 단 10분 떨어진 애서턴 Atherton의 아름다운 교외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을 극복해야 했고, 후에는 남성 중심의 위계서열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결국 페니는 삼촌 제이 Jay의 신뢰를 얻어 그가 직접 뽑은 후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40대 초반 페니는 하얏트 제국의 확장을 돕다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프리츠커 가족 중 몇몇이 페니와 토머스, 그리고 니컬러스를 다른 상속자들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배를 불렸다고 고소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셋은 하얏트 호텔과 세계적 재벌 그룹인 마몬 그룹 Marmon Group 등 수십억 달러 가치의 가업을 이끌고 있었다. 다른 사촌들은 자산을 매각하길 바랐다.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츠커 가(家)는 가문의 기업 왕국을 해체하고, 페니가 개인적으로 설립한 50억 달러 가치의 기업을 매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이 두 명의 오빠와 관계가 틀어졌다. 과거에는 이들의 성공을 위해 도움을 주던 관계였다.

때문에 페니가 실리콘밸리 여행에서 원기를 회복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기업 해체가 아닌 창업에 힘쓰는 경영자들과 기업인들을 볼 수 있었다. 오바마와 철학적인 성향이 같은 셰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 -페니는 페이스북 방문 당시 그녀를 만났다-같은 리더들이 많은 실리콘밸리에서도 페니는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특허 및 이민법과 관련된 푸념을 들어야 했다. 그중 가장 골치 아픈 일은 NSA의 실리콘밸리 스파이 활동이 폭로되면서 기술회사들이 해외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넋두리를 늘어 놓은 것이었다. 실리콘밸리 밖에서는 규제와 세금, 그리고 오바마케어가 기업인들의 가장 큰 불만이다. 단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론 성난 경영자들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지 못할 것이다.

페니는 기업인들을 동지라 여긴다. 그녀는 분쟁 관리에 능하고, 더 큰 선을 위해 고통스런 선택도 감수하며 다음 도전 과제를 향해 나가갈 수 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워싱턴정가에서 이례적이지만 잠재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첫 조카인 유명 영화제작자 지지 프리츠커 Gigi Pritzker는 “어릴 때 큰일을 겪으면 무너지거나 (우리 어머니제이의 아내인 신디 프리츠커 Cindy Pritzker다-가 항상 말씀하셨듯) 운동화 끈을 다시 꽉 조이게 된다. 페니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분노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큰 집중력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프리츠커 가는 굉장히 많은 것을 성취해왔다. 이는 록펠러 Rockerfellers 가문이나 로더 Lauders 가문처럼 미국의 명망 높은 가문의 기준으로 봐도 그렇다. 니콜러스 J. 프리츠커 Nicholas J. Pritzker는 활발하게 정치 활동을 하는 유대인은 목숨을 오래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코사크 Cossacks 부족의 경고를 받은 후, 1880년대 우크라이나의 키예브 Kiev에서 도망친 바 있다. 그는 시카고 거리에서 자신이 파는 신문을 읽으며 영어를 독학했고 후에 로펌을 설립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증손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며 사회에 환원한다는 이민자들의 가치관을 여전히 마음에 새기고 있다. 시카고 미술관의 프리츠커 실(Pritzker Wing)부터 프리츠커 어린이 동물원까지 시카고에 가면 이 가문의 사회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친구이자 시장인 람 이매뉴얼 Rahm Emanuel은 “페니 역시 시립학교 개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엄청난 경쟁심이 니콜러스의 후계자들을 자극했고, 어쩌면 그런 경쟁심 때문에 재산을 두고 법적 다툼까지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톰은 기업 오너일 뿐만 아니라 티베트 학자이기도 하다. 닉은 뛰어난 우주학자다. 페니 프리츠커는 스탠퍼드에서 법학 학위와 MBA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가문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요구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청난 책임감도 있었다.” 닉 프리츠커는 “정복할 다음 대상을 찾지 못하면 실패자가 된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초한 마음을 유대인 언어인 이디시어 Yiddish로 슈필커스 shpilkes라 한다”고 덧붙였다. 니컬러스의 아들 아브람 니컬러스(A.N.) Abram Nicholas는 하버드 법학 학위 덕분에 부동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의 큰아들 제이는 프리츠커 가문의 가장이 됐다. 매우 사교적 성격의 전설적 협상가인 제이는 하얏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남동생이자 엔지니어인 로버트 Robert와 함께 60개 기업으로 구성된 마몬 그룹을 설립했다.

프리츠커 가문 이야기에서 빠진 사람은 페니의 아버지인 돈 Don이다. 그는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하얏트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톰 프리츠커는 “돈의 성격이 하얏트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돈은 멋지고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광적인 스포츠 팬이었고, 테니스 코트에서는 열성적인 경기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건장한 체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굉장한 미식가였다. 톰은 “일단 그가 집안 여기 저기를 다니면, 즐겁게 웃으며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제이보다 열 살 어렸던 막내 동생 돈은 비범했던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제이가 200만 달러를 투자해 첫 모텔을 매입했을 때 그 기회를 잡았다. 로스앤젤레스 공항 옆 센추리 대로에 위치한 이 모텔은 하얏트 폰 덴 Hyatt Von Dehn이라는 사람에게서 매입한 것이었다. 당시 돈의 곁에는 신부 수 샌델 Sue Sandel이 있었다. 램프 제조업자의 딸인 그녀는 래드클리프 Radcliffe 대학 출신으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1959년은 페니가 태어난 해이자, 보잉 707이 막 출시된 해였다. 1960년대에는 기업인들이 여러 도시를 다니며 편안히 묵을 곳을 찾던 ‘제트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돈은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두 번째 호텔을 열었고, 가족과 함께 팰로 앨토 Palo Alto로 이주했다. 이곳은 과수원이 많고 스탠퍼드 대학 교수들이 많이 사는 조용한 도시였다. 이 두 개의 햐얏트 ‘호텔’은 캘리포니아 스타일 저층 모텔이었다. 2층으로 된 하얏트 호텔의 문은 매연이 나는 활주로와 주차장 방향으로 나 있었다. 매주 토요일 돈이 벌링게임 Burlingame의 비좁은 사무실로 출근할 때마다, 페니는 여자 화장실이 깨끗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갔다(돈은 남자 화장실을 확인했다). 그녀의 어머니 수는 직원 유니폼을 고르고, 사무직원들의 생일을 챙겼다. 페니는 “우리는 함께 사업을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수 샌델 프리츠커는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녀의 어릴 적 친구 베스 해리스 Beth Harris는 그녀가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 입었다”고 회상한다. 페니는 “어머니는 길고 매끈한 다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 다리가 아빠를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수는 또 남편만큼이나 의욕적이고 야망이 컸다. 닉은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프리츠커 가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길 바랐다”라고 말했다. 페니의 부모는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을 비롯해 헨리 포드 2세 같은 잠재적 투자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대접하곤 했다. 그녀는 낸시 펠로시 Nancy Pelosi라는 또 다른 주부와 민주당을 홍보하며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70년대 초 이들은 아주 매력적인 삶을 살았다. 돈은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크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호텔 체인을 이끌었다. 돈과 수는 또한 꿈의 집을 갖게 됐다. 이 집은 현대식 건축물로 이들의 화려한 사교활동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페니와 두 명의 남동생들-토니 Tony는 1961년, J.B.는 1965년에 태어났다은 유칼립투스 나무가 있는 집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남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지 않으면 후에 사회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다고 우려했지만, 그녀는 부모를 설득해 카스틸레자 Castilleja스탠퍼드 옆에 있는 이 지역 유일의 여자 고등학교다에 입학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의 매력적인 삶은 일순간 무너져버렸다. 하와이에서 사업을 하던 돈은 테니스 경기를 끝내고 어지럼증을 느끼더니 곧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겨우 열세 살이었던 페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그녀는 워싱턴 쇼핑 센터가 훤히 보이는 사무실 창가를 쳐다보며 적절한 말을 찾기 시작했다. “평생 안고 갈 마음의 응어리가 생겼다.”

그리고 곧 페니의 삶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린다. 그녀는 “엉망이었다”고 불편해하며 말했다. 남편뿐만 아니라 함께 공유했던 멋진 삶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수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페니는 언제나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선 애매하게 둘러댄다. “어머니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항상 안절부절못했다.” 페니는 아이 셋의 미망인이라도 그때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시대였다면, 어머니는 잘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페니는 “어머니가 결국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짧은 재혼 생활도 이혼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올해 초 그녀의 막내 동생 J.B.는 시카고 잡지를 통해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어머니와 종종 스스로 챙겨야 했던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째인 페니는 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특히 돌봐야 했던 J.B.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녀는 “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족의 유대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산을 지금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수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딸에게는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어머니였다. 페니는 “어머니는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건강 악화는 10대였던 페니가 더 일찍 철이 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니의 생물교사였던 에덜 미스 Ethel Meece는 “페니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빠져 있었고, 페니는 혼자서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녀는 페니 어머니의 래드클리프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페니는 카스틸레자에서도 성적이 매우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을 혼자 버터야 했던 세상에서도 잘 해쳐나갔다. 그녀는 여성 승마 선수로서 서구 전역을 여행했고, 주에서는 여섯 번이나 우승을 했다. 또 페니는 하버드에 합격했고, 그곳에서도 캘리포니아를 떠나 근처 밀턴 아카데미 Milton Academy에 입학한 J.B.의 어머니 역할을 이어갔다. 다른 대학생들이 파티와 미식축구를 즐길 때, 페니는 주말에 열리는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고 막내 동생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 친구 해리스 Harris는 “페니는 J.B.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케임브리지와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곤경에 빠진 어머니를 돌보기도 했다.

돈 프리츠커가 사망한 후 거의 10년 정도 지났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쇼핑을 하던 수는 그녀의 캐딜락 Cadillac이 고장 난 사실을 알고 견인 트럭을 부른 적이 있었다. 트럭 운전사는 후에 미 통신사 UPI 리포터에게 “수를 태웠을 때 그녀가 취해 있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또 그가 차고에 거의 다 왔다고 말하자 “그녀가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날 바라본 후 차 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녀는 보도에 머리를 박은 후, 트럭 바퀴에 깔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페니는 고개를 흔들며 “어머니가 뛰어내렸다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선 잘 모른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페니는 곧 공동 창업에 뛰어들었다. 1985년 6월에는 스탠퍼드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에서 페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현재 백악관 국가안보실장인 리즈 셔우드 랜들 Liz Sherwood-Randall은 “페니는 늘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길 원했고, 남성 중심의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얻고 싶어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가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스스로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는 트레이너를 고용한 후, 하와이에서 열리는 가장 고된 운동 중 하나인 철인 3종 경기를 신청했다. 그녀는 6개월 내내 하루 3시간에서 8시간씩 맹훈련을 했다. 2.4마일 거친 물결을 헤쳐 수영을 하고 112마일 자전거를 타고 달린 후 다시 26.2마일 마라톤을 완주했다. 그녀는 대회 날 하와이의 코나 Kona 코스를 달리다 용암 조각에 발을 다쳤다. 결국 페니는 12시간 만에 골인 지점에 들어왔다.

페니보다 열네 살 많은 닉 Nick 프리츠커가 그녀에게 가족 사업 참여를 권유했을 때, 페니는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모두가 닉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페니의 할아버지 A.N.은 본인이 1896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가 왜 사업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항상 이야기했다. 그의 아들은 어린 조카의 야망에 좀더 개방적인 입장이었다. 페니는 “제이는 할 수 있는 한 나를 많이 포용해줬다”고 말한다. 제이는 아내 신디와 함께 페니가 힘든 사춘기를 보낼 때, 그녀에게 부모 역할을 해주었다(제이 부부도 비극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이의 딸은 돈이 사망한 해에 자살했다). 페니는 제이를 ‘삼촌 아빠(Uncle Dad)’라고 불렀고, 시카고에 올 때마다 약속을 잡고 제이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목소리가 아주 작은 제이는 13세 나이에 시카고 대학에 입학한 신동이었다. 그가 느끼는 조카 페니의 야망은 놀라움에서 감명을 받는 데까지 나갈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80년대 말 그녀는 하얏트 개발팀의 핵심 일원이 됐다.

페니는 제이 삼촌의 숫자 감각을 물려받았다. 그녀의 오랜 사업 파트너인 케빈 푸어맨 Kevin Poorman은 “페니는 감가상각 같은 것을 매우 빠르게 처리했다”고 말한다. “나는 제이가 그녀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얏트 내부에서도 그녀는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닉과 톰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작성하며, 이미 한 일에 대해 ‘임무 완수’라는 말을 하곤 했다.

페니도 그녀의 아버지처럼 프리츠커 가문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부분’의 지배자가 됐다. 호텔 외 부동산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푸어맨은 “페니는 항상 자신의 입지를 다질 무언가를 찾았고, 호텔 사업에 관여하는 프리츠커 가문 사람은 충분히 많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그녀의 첫 프로젝트는 하얏트 클래식 레지던스 Classic Residence by Hyatt(후에 비 Vi라고 이름을 바꿨다)였다. 노인 부양이 노인 요양원을 의미하는 현 시대에 노인들을 위한 고급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회사였다. 27세의 페니는 휠체어 생활을 하는 외할머니를 돌보면서, 노인들을 위한 주거 공간의 부재를 더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 스스로 문제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페니는 18개월 동안 여섯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족 재산 약 4,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삼촌의 사무실을 찾아가 프로젝트의 실패를 알리고, 자신을 해고해도 좋다고 말했다. 텅텅 빈 주거 시설을 보며, 페니와 푸어맨은 새로운 하이브리드 주거 시설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뼈아픈 경험을 곱씹어야 했다.

제이는 이들에게 인내를 가르쳐줬다. 페니와 푸어맨은 경영진을 교체하고 마케팅을 개선했다. 현재 이 주거 시설에는 4,0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페니는 사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녀는 이어 마몬 그룹에 속한 신용회사인 트랜스유니언 TransUnion을 회생시켜 7년 만에 회사 가치를 3배로 늘렸다. 그녀는 오바마 대통령과 친밀한 사이였던 마틴 네즈빗 Martin Nesbitt과 공항 주차장 체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 미국 건축가 I.M. 페이 I.M. Pei가 디자인한 하얏트 센터를 건립했다. 페니는 맹렬한 협상가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공방 끝에 올랜도 Orlando에 위치한 구 해군 훈련 센터를 좋은 가격에 매입, 프리츠커 가의 부동산이 지역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했다. 지역주민들은 이 거래를 두고 시 공무원들이 프리츠커 가에 선물을 준 격이라고 비난했다.

그녀는 제이 프리츠커의 핵심 집단에서 신뢰받는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1995년 그가 후계자를 지명했을 때, 그는 큰아들 톰과 조카 닉, 그리고 당시 36세였던 페니를 후보로 삼았다. 이 두 남자는 제이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다. 탐은 “페니는 리더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제이 프리츠커의 목표는 가문을 더 번창케 하고, 더 많은 부를 축척하는 것이었다.

제이는 1999년 사망했다. 1년 후 일부 가족들은 이 ‘삼자통치’에 반기를 들면서, 후에 법률 용어에서 ‘자기 거래(self-dealing)’ *역주: 자기 이익을 위해 회사 이익을 희생하는 것라 불리는 혐의로 이들을 고소했다. 그 그룹에는 페니의 두 남동생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2002년 사촌동생-로버트가 재혼해서 낳은 자녀다-두 명이 또 그녀를 고소했다.

2001년 쉬운 해결책이 보이지 않자 톰과 닉, 페니는 프리츠커 가의 사업을 해체하고, 11명의 사촌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각 부분을 매각했다(로버트의 자녀들은 4억 5,000만 달러에 합의를 봤다). 닉은 “우리 가족이 성실히 건설해왔고. 제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복잡한 기업 구조-150개 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를 해체하는 것이 지난 11년간 우리의 ‘주요 업무’였다”고 말했다.

톰 프리츠커는 기업의 이익과 가족 구성원의 요구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웠다고 토로한다. 톰은 “어려움이 있어도 그냥 사업 계획을 추진시켜야 하는지, 아니면친척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친척들의 마음이 다칠까 염려해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털어 놓았다. 페니는 “사업을 일으켰던 경영진 및 모든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며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은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업 해체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정말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내가 세운 기업 대부분은 내가 기초부터 설립한 것이다.“이성적 판단으로 그녀는 구조 조정이 결국 가업-뚜렷한 후계 구도가 없는 상황이다-에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받아 들였다. 프리츠커의 다음 세대는 더 복잡하다. 그 세대에는 페니의 두 아이들 도널드 Donald와 로즈 Rose를 비롯해 수십 명의 아이들이 있다(페니의 남편 브라이언 트라우버트 Bryan Traubert는 안과의사다). 구조조정은 성공한 벤처 사업가인 그녀의 두 남동생 토니와 J.B.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페니는 그 과정에서 “동생들과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10년간 이어진 해체 작업은 마침내 작년에 끝났다. 몇 년을 끌었던 하얏트 주식 공모는 2009년에 시작됐다. 워런 버핏은 마몬 그룹을 매입했다. 그리고 2010년 프리츠커 가는 트랜스유니언 지분 대부분을 매각했다. 그리고 노인 주거 체인 ‘비’는 별도 회사로 분리됐다. 그렇다면 프리츠커 가의 역사에서 이번 챕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화해하게 될까? 페니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고, 그녀의 동생들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

정부가 제공한 검은색 SUV 차량이 조지타운의 작은 우넘 Unum 식당에 멈춰 서자, 페니가 주황색 수트를 입고 나타났다. 마치 어두운 날씨에 튤립이 활짝 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페니는 언제나 멋지게 차려 입는다. 그러나 그녀는 유행보다 디자인을 중시한다. 페니가 노인 거주 시설 체인 비를 설립했을 때, 그녀는 건물 디자인에 매우 자부심을 느꼈다. 시카고 링컨 파크 Lincoln Park에 위치한 그녀의 자택-아름다운 현대식 건물이다-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듯 말이다. 그럼에도 핑크색이 가미된 밝은 오렌지 색은 매우 대담한 선택이었다. 특히 식사 후 대통령과 부통령을 만나기로 했었기 때문에 더 특별해 보였다. 그녀는 “봄이잖아요”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페니는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청바지 차림과 슬리퍼를 신고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90년대 오바마가 시카고 대학의 법학 교수로 있을 때, 그의 인척들(미셸의 오빠 크레이그 로빈슨 Craig Robinson과 그의 가족)은 페니의 미시간 호수 별장을 자주 방문했다. 실제로 페니가 오바마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모금해 클린턴과 싸우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가 백악관 집무실에 입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오바마와 페니는 이상한 동맹관계다. 페니와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는 미 국세청을 피해 역외 금융에 거의 모든 재산을 보관했다. 그는 미 국세청이 재산을 몰수해간다고 생각했다. 사촌들은 하얏트에서 페니의 첫 번째 임무는 소득세 연기를 위한 부동산 교환(Section 1031 real estate exchange) *역주: 부동산을 처분하고 다른 부동산을 매입하는 경우 부동산 판매에서 얻은 소득 100%에 대해 세금 납부를 연장해 주는 미 국세청 규정이었다고 말한다. 보스턴 하얏트의 무노조 원칙은 그녀에게 감점 요인으로 작용했다. 반면 오바마는 노조를 끌어안고, 대기업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맺고, 탈세자들을 비판했다.

때문에 오바마가 2008년 대통령에 선출된 후, 페니를 상무부 장관에 앉히기는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그녀 이름이 장관 후보자로 거론될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자들의 반대는 물론, 파산한 시카고 슈피리어 Superior 은행과 그녀의 관계는 큰 논란을 빚었다. 규제 당국은 이 은행이 과도한 서브프라임 투자와 회계 관행으로 점점 불어나는 손실 규모를 은폐하다 2001년 결국 파산했다고 지적했다. 슈피리어 은행은 제이가 1987년 절친이자 도시 개발자인 앨빈 드워맨 Alvin Dworman과 함께 매입한 은행이다. 2002년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 보고서는 “슈피리어 은행이 파산한 주요 원인은 오너들과 경영자들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페니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이 은행 회장을 지냈고, 이후에는 지주 회사를 이끌었다. 파산 직전 몇 개월간 그녀는 은행의 자본재구성을 위한 협상을 이끌었으나, 이 3억 5,100만 달러 규모의 계획은 철회됐다. 슈피리어 은행이 그 어떤 성공적인 결과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부실자산이 됐기 때문이었다. 페니는 “이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해보려 했지만, 다 엉켜버렸다”고 말했다. 드워맨은 언급을 일절 피했다. 은행이 파산했을 때, 무보험 예금자들은 약 1,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프리츠커 가족은 4억 6,000만 달러의 벌금을 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논란 외에도, 페니는 개인적인 이유로 오바마 1기 팀에 합류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프리츠커 가에 하얏트를 해체할 법적 의무를 지고 있었다. 사업 매각이 마침내 끝났을 때, 그녀와 푸어맨은 투자 기업 PSP 캐피털 PSP Capital을 설립했다. 페니는 경영인으로서 삶의 다음 챕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봄 백악관은 그녀를 불러들였다.

상무부에 입성한 지 1년이 안됐지만, 페니는 이미 민간 부문의 창업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그녀는 날씨와 미국 국민, 그리고 경제에 대해 상무부가 정기적으로 수집하는 귀중한 자료를 공개했다. 날씨에 대해서는 미국해양대기관리처(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미국 국민에 대해선 인구 조사국(Census Bureau), 그리고 경제는 상부무 경제분석국(Bureau of Economic Analysis)이 발행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그녀는 기업인들이 이 정보를 이용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거나, 야후의 날씨 앱처럼 이 수치들을 분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길 바라고 있다. 페니가 노인 주거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인구통계 수치 덕분이었다. 그때 그녀는 데이터 크기가 수익의 크기와 같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다. 그녀는 “우리는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데이터를 제공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상무부 장관직은 호텔 집안의 딸에게 매우 잘 맞는 자리였다. 이 자리는 오바마 1기 때는 거의 비어 있거나 적임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개점 사인(an OPEN FOR BUSINESS sign)’을 문에 걸어두고, 전국을 다니며 기업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그녀는 논란을 피하면서 기업과 오바마 행정부가 의견을 같이하는 무역 및 투자, 선진 제조업 지원 및 미국 기업의 수출 확대 같은 이슈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미국 경제가 교착상태에 있기 때문에, 경험 많은 기업인들은 그녀가 백악관에서 좀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자신들을 대변해 주길 희망하고 있다. 미국 내 200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Business Roundtable의 의장 존 엥글러 John Engler는 “백악관이 CEO들을 초대해도 그것이 정책적 후속 조치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법인세 감축과 이민법 개정, 규제 부담 완화, 캐나다 및 미국 북부에서 남부 멕시코만으로 원유를 운송하는 키스톤 파이프라인 Keystone pipeline 사업 승인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엥글러는 “그녀는 맡은 업무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백악관이 더 큰 힘을 써야 한다.”

기업인들은 두 가지 이슈에 주목할 것이다. 첫 번째는 그녀가 얼마나 백악관을 설득해 FTA에 반대하는 민주당에 맞설 것이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국의 법인세를 얼마나 낮추느냐이다.

내부자들은 페니가 이러한 이슈들을 비롯한 여러 사안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실리콘밸리 기업인들과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백악관이 NSA 개혁 정책을 세우도록 했다. 또 기술 회사들이 수집한 소비자 데이터를 기업이 어떻게 취급하고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고서가 지난 4월 발행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녀의 영향력은 외교분야까지 확장되고 있다. 5월 초, 페니는 CEO들에게 전화를 걸어 러시아 경제 포럼에 참석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에 대해 제재조치 이상의 불이익을 주기 위해서였다.

페니는 지금도 가끔 철인 3종경기를 즐긴다. 필자는 그녀에게 마라톤을 몇 번이나 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일곱 번인가?”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여덟 번?”하고 갸우뚱거렸다. 이렇게 대답한 페니는 무질서하게 뻗어 있는 상무부의 관료체계를 하나의 힘으로 모아, 경제 성장을 주도할 수 있게 만드는 인내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녀가 이 일에 성공하면, 지지자들은 페니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페니는 원하기만 한다면 실리콘밸리에서 창업도 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