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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8년 26세 청년은 옥탑광고 회사를 하나 차렸다. 이것이 대박을 쳤다. 10년 넘게 광고업자로 활동하면서 100억원대 자산을 모았다. 이번에 영업정지를 당한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 얘기다.
임 회장은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한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광고회사에서 번 돈으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1999년 자본금 30억원 규모의 솔로몬신용정보를 세웠고 2002년 골드저축은행을 인수해 저축은행 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솔로몬은 승승장구했다. 2005년 부실사였던 부산 한마음저축은행, 2006년에는 전북 나라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업계 1위로 뛰어올랐다. '징기스칸' 광고를 TV에 내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고 2008년 3월에는 업계 처음으로 솔로몬투자증권(옛 KGI증권)을 인수했다. 증권사를 사들여 종합금융그룹의 기틀을 갖춘 것이다.
특히 부동산 활황기를 맞아 솔로몬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대거 투자했다. 2007년까지만 해도 PF는 짭짤한 수익이었다. 2007년 6월8일에는 주가가 2만3,209원(액면가 5,000원)까지 치솟았다.
이 같은 성공 뒤에는 임 회장의 수완이 자리하고 있다. 전남 무안 출신으로 '마당발'로 통하는 임 회장은 40대에 솔로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밀어붙이는 능력이 탁월하고 자산투자도 일일이 챙길 정도다.
그는 싱글 수준의 골프실력에 타고난 친화력으로 업계는 물론 정관계ㆍ언론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저축은행 서울 지부회장을 맡으면서 업계 입 역할을 도맡아 했고 저축은행 업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을 많이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효자였던 PF가 발목을 잡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급락하자 솔로몬의 위치도 뒤바뀌었다. 2007년 말 부동산 PF 잔액만 전체의 40%에 달했고 대출은 급속도로 부실화했다.
호남 출신인 것도 문제가 됐다. 그는 1987년 당시 평화민주당 외곽조직인 '민주연합청년회' 기획국장을 해 DJ 정부 실세와의 관련설이 나돌았다. 시중은행의 전직 임원도 "솔로몬 출범 초기시 정권 실력자가 연락을 해 은행 출신 임원을 솔로몬에 보내 경영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국가정보원 등이 계속 관심을 갖고 솔로몬을 지켜봤다. 2009년에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에서 특별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외풍에 시달린 셈이다.
임 회장과 달리 윤현수 한국저축은행 회장은 '은둔형' 오너였다. 한때 그룹 기준으로 저축은행 업계 1위까지 됐지만 언론 등 대외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고 배후에서 경영을 지휘하는 데만 몰두했다. 사진에 조예가 깊고 수차례 사진전을 열었던 것도 은둔형 이미지와 들어맞는다.
이 같은 배경은 과거 사건 때문이다. 2003년 2월 잘 나가던 인수합병(M&A) 전문가였던 그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전력이 있다.
당초 윤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간 빅딜에도 참여하면서 권성문 KTB네트워크 사장, 김석기 전 중앙종금 회장 등과 함께 대표적인 M&A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1996년 코미트M&A를 창립해 대상그룹 유화사업 부문 매각건을 비롯해 기업 경영권 방어, 외자도입 등에서 자문역으로 활약했다.
그만큼 윤 회장은 M&A에 밝다. 2000년 진흥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현재의 한국저축은행으로 바꾼 데 이어 경기ㆍ진흥ㆍ영남저축은행, 한국종합캐피탈 등을 사들였다. 한때 한국 측은 전북은행의 지분을 크게 늘려 경영진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단일 저축은행으로는 솔로몬이 1위였지만 계열사들을 모두 더하면 한국이 제일 덩치가 크기도 했다.
그런 한국도 부실 PF 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PF 부실로 회사가 휘청거렸다. 자본금이 적은 저축은행의 특성상 회사가 나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난해 2차 구조조정에서 간신히 대상에서 빠지기는 했지만 악화된 재무 상태를 개선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금융감독 당국의 검사 결과 드러난 대한전선과의 불법 거래도 문제였다. 두 회사는 오너 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측은 대한전선에 한도를 넘는 불법대출을 해주고 대한전선 측은 후순위채를 사주는 등 서로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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