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김나영 기자의 一日一識] <36> ‘배신’에 대처하는 자세

줄리어스 시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Vincenzo Camuccini의 ‘The Death of Julius Caesar’. 1804년~1805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사극 전문 작가였습니다. 4대 비극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썼던 작품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였습니다. 그중 가장 힘을 주어 썼던 희곡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작품입니다. 지난 가을 유난히 인기를 끌었던 연극 작품이기도 하죠. 그런데 재미있게도 ‘시저’의 주인공은 지도자 본인이 아닙니다. 그를 과감하게 배신해 버리고 자책하는 브루투스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배신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마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를 배신한 유다에게 독백의 기회를 준 것처럼 말이죠.

브루투스가 시저를 배신한 것은 돈 서른 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명예,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브루투스 가문의 장남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라는 거대한 권력자들 사이에서 힘없이 구석에 자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은 없지만 대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유난히 따르는 사람이 많던 줄리어스 시저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미망인이었던 브루투스의 어머니에 대한 호감도 있었지만, 공화 정치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브루투스의 명성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젊은 친구를 사랑한 시저는 그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계속 ‘밀어 줬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받은 브루투스는 무엇으로 보답했을까요? 바로 ‘배신의 칼’이었습니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모해하는 데 선봉에 섰습니다. 결정적인 동기는 ‘당신의 이름이 시저의 그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며 정의를 지킬 것을 종용하는 카시우스의 속삭임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시저는 로마 공화정의 지도자에서 영원한 군주로 등극하려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브루투스는 본인을 음지에서 양지로 꺼내 준 멘토의 등 뒤에 칼을 꽂습니다. 친구들을 모으고, 3월 15일 원로원으로 등원한 시저에게 십 수명의 의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말죠.

그런데 이 상황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음모가 진행되는 낌새를 눈치챈 시저의 대응 방식입니다. 부인 칼푸르니아가 꿈자리가 좋지 않다며 등원을 말리자, 시저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비겁한 자는 죽기 전에 공포에 질려 여러 번 죽소. 그러나 용감한 자는 한번 죽고도 영원히 사는 법이라오.”





브루투스가 ‘시저는 죽였으나 그 정신과 영혼에게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되짚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등원하려 집 앞에 당도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파에게 포도주 한잔을 대접하고 ‘최후의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다가올 위험 따위는 안중에 없고,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에는 당당한 그에게서 지도자다운 면모가 보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결국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전에 시저의 영혼을 만나 제압당하고 만다고 서술합니다. 브루투스가 끝까지 배신자로 그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시저가 지도자로서의 완벽한 스타일과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일 겁니다.

한때나마 공직기강비서관이라는 중직에 있었던 사람,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정권 출범과 함께 청운의 꿈을 품었을 사람들이 연이어 등을 돌렸습니다. 요즘 정치권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배신 당한 시저’가 내뱉은 마지막 대사 “브루투스 너마저”가 절로 떠오릅니다. 돌아선 이들이 상대방을 마음속으로만 적대시한다면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미디어를 이용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배신의 명분을 민중들에게 당당히 밝히는 것, 그것은 브루투스 조차 하지 못했던 행동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왕조 시대처럼 군주와 신하 사이도 아닌데 양심고백이 왜 ‘배신’으로 비유되냐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잠시라도 소속돼있던 집단의 수장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의감 때문이건 아니면 ‘결코 본인의 이름이 가볍지 않다고 여겨서’이건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사태를 촉발시킨 것뿐만 아니라 이를 종식시킬 수 있는 열쇠 역시 모두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찌라시 수준의 이야기를 갖고 논란이 커져서 안타깝다’는 제3자 화법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시저처럼 그 지위에 걸맞는 당당함과 본인만의 스타일이 필요한 때 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배신의 드라마’를 새로운 방식으로 종결지어야 합니다. 결말을 미리 지어주고 모든 상황을 정리해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력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결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승부’라는 어느 연극인의 말처럼 박 대통령이 보여줄 ‘새로운 승부’를 기대해 봅니다.

/iluvny23@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