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자원은 한정돼 있어 이를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의료공급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국가 의료제도의 핵심요소다. 이를 위해 1989년 전국민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하면서 전국을 행정구역·생활권에 따라 8개의 대진료권과 142개의 중진료권을 설정했으며 의료기관 역시 1·2·3차 진료기관으로 분류해 의료기관 간의 기능분담을 시도했다. 이는 당시 논란이 됐던 의료기관의 기능적 단절성, 지역 간 의료자원의 불균형, 환자의 대형병원 집중 등 문제개선을 위한 것이었다.
수도권·종합병원 쏠림에 비용만 늘어
하지만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제도가 된 것이 현실이다. 1989년 도입한 의료전달체계로 개선하려고 했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특히 1998년 이후 의료기관 간 경쟁은 주로 병상과 고가의료장비 설치 등 고급화와 양적확대 위주로 진행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급성기 병상과 장기요양병상은 1, 2위를 다투고 있고 인구당 고가의료장비는 상위그룹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의료자원의 공급과잉과 과당경쟁으로 불필요한 의료비 증가와 함께 비효율적인 진료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굳이 입원이 필요 없거나 고가 장비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환자에게도 입원을 시키거나 고가장비를 써 불필요한 의료비를 증가시킨다. 또한 입원의료 위주로 해야 하는 종합병원급 이상에서 외래급여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의료기관의 36%에 달한다는 사실은 의료전달 체계상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의료전달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비효율적인 의료공급체계는 국민의료비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반면 의료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가 환자의 거주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진료권을 폐지하고 의료이용의 단계를 3단계(1·2·3차 의료)에서 2단계로 축소하면서 의료전달체계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사건에는 가정을 적용해보고 싶다. 물론 당시 지역 간 의료자원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는 보건의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었다는 점은 자명하다.
지역 간 의료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진료권을 폐지하는 대신 지역 간 의료자원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의료 지역화와 의료이용의 단계화를 강화하는 방향이 옳았다. 그랬다면 우리의 보건의료는 환자의 수도권 집중현상과 이로 인한 지방의료와 동네의원의 역할 및 기능 위축, 의료이용량·의료비 급증 등 논란이 되고 있는 지금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의료 지역·단계화로 효율 높여야
의료체계에서 의료의 지역화와 단계화를 통한 효율적인 의료공급체계를 확립하는 것은 보건의료자원의 낭비를 방지하고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핵심사항이다.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체계가 직면하고 있는 고비용·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의료기관의 기능정립을 포함한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철저히 인식하고 점진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 첫 번째 노력은 공급 측면에서는 의료기관의 기능 정립과 수단 확보이며 수요측면에서는 체계적 의료이용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민들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