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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연말마다 으레 국회가 예산을 늑장 심사해도 설마 해를 넘기기야 하겠어라고 치부했죠. 그런데 이번 연말에는 '설마' 하고 지나갈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우려에 대해 기획재정부의 한 간부가 던진 이야기다.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갈등이 올해는 심상치 않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기재부의 또 다른 간부 역시 "솔직히 (달리는 기차 앞에서 누가 오래 버티나 겨루는) 치킨게임도 시작하기 전에는 누가 죽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오기를 부리다가 기차에 치이는 불상사가 나는 것" 이라며 "자칫 이번 예산안 처리도 이런 파국을 빚을 수 있다" 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예산안의 연내 처리 불발 가능성을 실존할 수 있는 위협으로 보고 대응책(컨틴전시플랜)을 물밑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예산안이 해를 넘길 경우 당장 연초부터 집행해야 할 각종 정부의 경비나 재정사업비 등을 어떻게 충당해야 하는지 법리적 검토 등을 하고 있다는 게 기재부 측의 설명이다.
현재는 기재부 내부 차원에서 검토 중이며 앞으로 국회 논의 추이에 따라 법제처 등 유관부처 등과의 협업을 통해 추진될 수 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지난주 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예산안 문제에 대해 이른바 '플랜B(대응책)'를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정부는 최악의 경우가 오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 같은 '셧다운(정부 폐쇄) 사태'가 빚어지지는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다. 기재부 고위관계자는 "그런 경우는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예산안이 설령 연내에 처리되지 않는다고 해도 정부는 별도의 (임시예산) 편성 절차 없이 전년 같은 기간에 집행된 재정에 준해 예산을 집행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전년도에 준해서 집행할 예산', 즉 준예산 자금을 어디서 마련하느냐에 대해 답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준예산을 어디에 쓸지 용도를 규정하고만 있을 뿐이고 자금조달 방법은 어떤 법이나 정부 지침에도 규정돼 있지 않다. 쉽게 말해 세금 등을 거둬들인 세수 한도 내에서만 준예산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세수로 모자란 돈은 국채발행이나 한국은행 차입 등으로 빌려 쓸 수 있는지 법적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산안 처리가 불발돼 내년 초부터 정부가 준예산을 집행하더라도 만약 지출예정액이 재정수입을 초과한다면 자칫 부족한 돈을 차입할 근거를 찾지 못해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행정마비가 초래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매년 1월의 세수는 연간 세수의 12.3~16.0%(약 20조원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우려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기재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물론 준예산을 집행할 때 일시적인 세입부족으로 단기간에 정부의 자금 미스매칭(수급불일치)가 빚어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며 "다만 준예산은 인건비·경비·계속비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지출에만 할당되므로 실제 재정수요가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구체적인 자금수급을 시뮬레이션한 단계 이전에 나온 발언이어서 실제 준예산이 집행되는 사태가 발생하면 어떤 부작용이 빚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회가 나라 살림의 파국이 빚어지지 않도록 연내 예산안 처리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정책 당국자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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