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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음서제


고려 시대에는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이들의 자녀에게 과거를 통하지 않아도 벼슬을 내리는 음서제(蔭敍制)가 있었다. 부모의 음공(蔭功)에 따라 자손을 벼슬에 서용(敍用)하는 일종의 특혜제도였다. 처음에는 장자(長子)만 혜택을 받았고 직위도 엄격히 제한했지만 제대로 지켜질 리 만무했다. 문벌귀족들이 압력을 넣다 보니 조정에 동생이나 사위·조카에 이르기까지 친인척으로 가득 찼다. 오죽하면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은 유관 업무에 종사할 수 없도록 상피제(相避制)라는 것까지 도입했을까.

요즘에도 부모의 지위가 자녀 취업에 영향을 미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열린 채용이 늘어나고 있다지만 아직도 입사원서에 부모의 직업과 직장명은 물론 직위까지 적게 만드는 곳이 적지 않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은근히 집안 배경을 과시하는 게 불문율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법조계의 길을 걸어왔다거나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세계를 여행하면서 외국어를 습득하며 경험의 폭을 넓혔다고 기술하는 식이다. 한 포털사이트가 조사했더니 구직자의 64.6%가 부모의 지위나 재산 등이 본인 실력보다 취업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이러니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은 엄마의 역할이지만 군대와 취업은 아버지 몫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시중에 나돌 수밖에 없다.

새정치민주연합 윤후덕 의원이 로스쿨 출신의 딸을 대기업에 취업시키려고 회사 대표에게 청탁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파장을 낳고 있다. 회사 측은 1명을 뽑겠다던 채용공고와 달리 윤 의원의 딸까지 포함해 2명을 입사시켰다고 한다. 취업준비생들이 국회의원 같은 '슈퍼 갑'을 아버지로 둔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말도 들려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돈 없고 빽 없는 아버지'들의 어깨가 축 처질 만한 일이다. 학자들은 고려가 망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음서제를 꼽고 있다. 낙하산 인사도 모자라 현대판 음서제까지 판치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나라 꼴을 보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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