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등 반도체 3사가 주력사업인 시스템LSI(대규모집적회로) 부문을 통합해 세계적 반도체설계 전문회사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D램 반도체시장을 석권한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 등이 최근 시스템LSI 분야에 바짝 공을 들이기 시작한 가운데 일본의 시스템LSI 업체들이 D램 업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자구적인 재편에 돌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8일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ㆍ후지쓰ㆍ파나소닉 등 3사가 시스템LSI 사업을 통합하고 여기에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가 수백억엔을 출자해 반도체 설계ㆍ개발 전문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스템LSI는 휴대폰이나 디지털기기ㆍ자동차 등을 제어하는 반도체로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인텔이 시장의 85%를 점유하고 있다. 르네사스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ㆍ퀄컴 등에 이어 4위권 내에 머물러 왔지만 최근 삼성전자가 시스템LSI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급성장세를 보이면서 세계시장에서 일본 업체들의 지위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르네사스 등 3사와 혁신기구는 오는 3월 말까지 사업통합을 위한 기본합의를 마치고 2012회계연도가 끝나는 내년 3월 말까지 사업통합을 마무리 짓기 위해 사업재편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일본은 연간 매출액 5,000억엔 규모로 시스템LSI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대형 개발전문 회사를 배출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신설회사와 도시바 등 대형 2개사가 시스템LSI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게 된다.
또 거액의 설비투자가 지속돼야 하는 생산 부문은 설계 부문과 분리, 산업혁신기구가 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2위인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와 함께 일본에 설립할 새로운 생산전문 업체에 이관할 계획이다. 새로 설립될 생산회사는 르네사스의 쓰루오카 공장과 후지쓰의 미에 공장을 넘겨받을 예정이며 경영난에 빠진 D램 반도체 업체인 엘피다메모리로부터 히로시마 공장을 매입하기 위한 협상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일본 반도체 업계가 수 차례에 걸친 재편과정을 밟아오는 동안 전기전자 대기업이 반도체 사업을 통합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도체 설계ㆍ개발 부문과 생산 부문을 따로 떼어 전문회사 설립을 추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대형 반도체 업체들은 기술개발부터 회로설계ㆍ생산까지 일관하는 '수직통합 모델'이 품질이나 가격경쟁에서 유리하다는 입장을 고집해왔다. 하지만 시스템LSI는 자동차나 휴대폰 등 분야마다 주문이 세분화되기 때문에 일괄생산으로는 오히려 개발 및 생산효율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지난 2000년대 이후 퀄컴 등 특화된 개발전문 업체와 대만의 TSMC 등 위탁생산 전문업체들이 급성장해온 반면 일본 업체들이 만성적자에 시달린 것도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자금 부담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의 경우 지난해 4~12월 연결결산은 331억엔의 영업적자를 기록했으며 후지쓰나 파나소닉도 시스템SLSI 관련 부문이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3사 통합계획이 성사될 경우 설계ㆍ개발과 생산 부문 분리를 통해 첨단 기술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생산효율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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