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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 때문에 애꿎은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미국이 겉으로는 중국ㆍ일본과 같은 경제 대국들과 통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척하지만 정작 당사국들은 압력에서 슬쩍 비켜나가고 한국ㆍ태국 등 주변 아시아 국가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태국 밧화 사태 역시 일본과 중국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생긴 극단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올 들어 아시아 주요국의 통화 변동률을 보면 엔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통화들이 달러화 대비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20일 현재 925원80전)은 지난해 말(1,011원60전)보다 9.3%나 절상됐다. 같은 기간 아시아 국가 중 달러화 대비 절상폭이 가장 큰 곳은 태국 밧화였다. 밧화의 절상폭은 15.0%였으며 5년 전에 비하면 그 폭이 무려 23.9%에 달한다. 싱가포르 달러화도 지난해 말보다 8.0%나 절상됐다. 반면 중국 위안화는 미국의 거센 절상 압력에도 불구하고 3.2% 절상되는 데 그쳤다. 겉으로는 중국과 미국간 통화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 같지만 실제 위안화 절상폭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말 그대로 손톱만큼만 이뤄진 셈이다. 일본 엔화의 움직임은 더욱 심해 ‘글로벌 달러 약세’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20일 현재 엔ㆍ달러 환율은 달러당 118.17엔으로 지난해 말 대비 0.3% 절하됐다. 지난 2003년 말(106.92엔)과 비교할 경우 절하폭은 9.5%에 달한다. 반면 같은 기간 원화 환율의 절상폭은 무려 28.8%(1,192원60전→925원80전)에 달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상당수 국제 투자은행(IB)들은 올해 엔화가 105엔대까지 절상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은 이런 전망이 사라진 지 오래다. 엔화의 ‘나 홀로 약세’ 현상은 외형상으로는 제로 금리인 일본의 낮은 금리를 활용해 엔화를 빌린 다음 금리가 높은 다른 나라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지만 실상은 미국과의 밀월관계에 따른 보은(報恩)이 아니겠느냐는 시각도 적지않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동아시아 안보에 있어 일본이 맡고 있는 역할 때문에 미국이 일본에 경제우호적인 환경(엔화 약세 용인)을 제공해주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지적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역외 투기세력들이 일본과 중국 외환시장에서 이익 추구를 하려다 실패하자 다른 아시아 국가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엔화와 위안화를 제외한 아시아 통화 절상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되느냐다. 오재권 한국은행 외환시장팀장은 “중국이 위안화 추가 절상을 급격히 용인하고 있는데다 일본의 저금리 정책도 조만간 끝날 것으로 보여 내년부터 여타 아시아에 주어진 부담은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다만 위안화와 엔화가 실제 절상될 경우 다른 국가들의 통화도 추가 절상압력에 시달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쌍둥이 무역적자 개선을 원하는 미국을 달래기 위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노력(절상압력)이 내년에도 계속될 경우 ‘제2의 태국 밧화’ 사건이 재연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20일 “강력한 외환규제책을 발표한 태국에 이어 한국도 원화 평가절상을 막기 위한 규제책 도입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물론 태국은 하루 만에 그 같은 조치를 번복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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