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개발업체인 A사는 2000년대 중반 대구시에서 주택사업을 진행했다. 지난 2009년께 착공과 함께 분양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A사는 개발사업에서 손을 뗐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주택경기 침체로 사업성이 악화된 탓이 크지만 '인허가 리스크'도 한몫했다. A사 관계자는 "우여곡절 끝에 사업승인을 받았는데 건축심의 과정에서 한 심의위원이 느닷없이 단지 설계가 너무 빽빽하다며 동(棟) 하나를 빼라고 요구했다"며 "법에도 없는 근거를 내세워 이런저런 조건을 요구하는 바람에 건축심의가 자꾸 늦어졌고 분양성이 악화되면서 결국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아파트는 다른 업체에 사업권이 넘어갔고 당초 계획보다 4년이나 지난 올해에야 착공이 이뤄졌다.
역대 정부의 주택정책을 관통하는 기조는 '공급 확대'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에는 아파트를 대량으로 짓는 것이 최대 미덕이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 같은 정책 기조에 변화가 생겼다. 올해 주택공급 목표는 37만가구로 지난해 58만7,000가구에 비해 37%나 줄었다. 미분양 아파트가 7만가구를 웃도는데다 경기침체로 주택 수요가 감소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서고 자가보유율도 60%선에서 정체되면서 기존의 확대지향적 주택정책이 종언을 고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존 대량생산ㆍ판매 방식에 맞춰진 기존 주택공급 체계를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시장 변화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해 다양한 주택공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인허가 절차의 합리적인 정비와 투명성, 예측 가능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심의 과정서 불합리한 요구로 사업 지연 다반사=주택건설사업은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토지 매입에서부터 사업계획 수립과 승인, 착공 및 분양승인, 준공 후 사용승인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주택법이 기본적으로 주택건설을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됐지만 실제 인허가 과정에서는 오히려 주택건설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인허가 절차가 복잡한 탓도 있지만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심의 및 협의 절차를 파생시켜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주택건설사업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건축 및 지구단위계획 심의에 참가하는 심의위원들이 법적 근거도 없고 책임도 없는 재량권을 행사해 사업을 지연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한 대형 건설사의 주택사업 담당자는 "사업계획승인에 걸리는 기간이 60일에서 40일로 줄었지만 별 의미가 없다"며 "승인요건을 맞춰 가도 '창문 형태와 색상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시일을 끄는 경우도 있다"고 토로했다. 특히 지방의 경우 사업계획승인 조건으로 지역업체를 사업에 참여시킬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고 공원이나 복지시설 등 과도한 기부채납을 강요하기도 한다. 다른 대형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주택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허가권자인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조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사업자가 민원을 해결할 때까지 사업승인이나 심의 절차가 올스톱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주택협회가 2008년 펴낸 '주택건설사업 인허가 절차 간소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택지 확보 후 주택건설사업과 관련된 기본사업 절차와 소요기간은 건설기간을 제외하고 최소 41주가 소요되고 심의 및 협의 과정에서의 보완, 반려, 수정, 재심, 조건변경, 임의규정 적용 등이 발생할 경우 사업기간은 무한정 지연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근거 모호한 지자체 규정ㆍ지침 관행 깨야=건설업계의 지속적인 요구로 주택건설사업의 인허가 절차 개선을 위한 규제 완화가 꾸준히 이뤄져 지난해 도시계획ㆍ건축ㆍ교통 등 사업계획승인과 관련된 심의를 통합해서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법 개정과 현실은 별개라고 지적한다. 법ㆍ제도와는 별도로 지자체별로 각종 규정이나 지침을 통한 규제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재건축사업에서의 소형의무비율 30%룰과 공공건축가 제도다. 김승배 피데스개발 대표는 "주택법이나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어디에도 이 같은 조항은 없다"며 "지자체가 법에도 없는 규정과 '옥상옥 제도'를 만들어 규제를 하니 사업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심지어 지자체가 인허가권을 무기로 근거도 없는 가격 인하 압력을 행사하거나 사업과는 무관한 도로 등 기반시설 설치를 요구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수도권에서 최근 아파트사업을 한 C사 관계자는 "해당 사업에 필요한 도로가 아닌데도 인근 주민의 민원 때문이라며 이를 설치해야 인허가를 내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며 "사업 한번 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는 게 업체들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의열 한국주택협회 정책실장은 "중앙정부나 광역 시도에서 기초단체로 내려갈수록 심의 과정의 일관성이 결여되고 과도한 간섭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심의위원들의 월권을 막을 수 있는 추가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