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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 이어 신흥국마저 성장세가 둔화되자 세계 경제학계에서는 '세계 주요 국가에서 저성장 기조가 굳어질 것인가'라는 문제가 주요 논쟁의 이슈가 되고 있다.
배리 아이켄그린(사진) UC버클리 경제학과 교수는 22일 열린 '서울포럼 2014' 둘째 날 기조강연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세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술혁신 때문이다. 그는 "어디선가 기술혁신이 분명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 기술이 실제 상업화에 이르러 사회의 적응을 마치는 순간 또 다른 급성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금융위기의 역풍으로 지난 2011년 이후 미국의 생산성은 오직 1.0% 성장에 그쳤으며 가계·은행·회사들도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최근 들어 고용·생산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회복 자체보다는 성장둔화가 이어지는 '장기침체'에 접어든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간적 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200년을 내다본다면 로봇공학이나 인간게놈 프로젝트 등 패러다임을 바꿀 혁신기술들은 이제 막 태어난 셈"이라며 "기술개발은 비록 양극화를 야기할지언정 경제성장을 지속시킬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기술들이 지금 당장 생산성 향상을 이끌고 성장동력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아이켄그린 교수는 "사회가 기술을 수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자동차 개발사를 예로 들었다. 그는 "칼 벤츠가 첫 자동차 특허를 따낼 때가 1879년이었지만 실제 자동차는 엔진과 트랜스미션·브레이크 등 관련 기술이 생기고 도로 같은 인프라가 구축된 1913년 이후에야 실제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며 "내가 기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믿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특히 3D프린팅이나 나노로봇 등이 19세기의 현미경, 20세기의 컴퓨터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최근 이어지고 있는 생산 기술(tool) 발전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앞으로 나노 기반 탄소복합소재, RNA 기반 치료기술, 리튬이온 배터리 등 어떤 기술이 혁신을 이끌지, 어떤 방향으로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며 "다만 역사적으로 생산성 저하 신호가 나타난다면 이는 더 나은 기술혁신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강조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현재와 같은 경기침체기가 기술혁신을 추진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기침체로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를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며 "기술의 상업화를 위한 연구개발(R&D) 투자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금리 기조에서 R&D 투자를 늘리는 곳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R&D 지출 현황을 보면 한국의 경우 4위로 9위인 미국보다 오히려 더 높고 일본보다 약간 낮은 정도"라고 덧붙였다. 또 "과학자나 엔지니어 등의 인력도 일본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국 역시 따라잡고 있다"며 기술혁신을 위한 기반이 잘 갖춰져 있다고 전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아울러 중국이 한국의 기술 분야 경쟁국가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모든 고성장 경제는 저성장 기조로 돌아선다"며 "국내총생산(GDP)이 1만달러, 1만6,000달러일 때가 고비인데 한국은 1989년, 1998년이 각각 해당 시기였으며 중국은 지금이 한국의 1989년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은 현재 유령도시, 텅 빈 공항 등 비효율적 과잉 투자와 R&D 투자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며 "하지만 앞으로 20년 전망을 해보면 기술집약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이 같은 세계 경제의 변화에 대응한 한국의 대책으로 '규제 해소'를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서비스산업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규제장벽이 너무 높아서"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제조업에서 이미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제조업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며 "이에 앞으로는 서비스산업에 투자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지금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제조업에 집중해야 하는지, 그다음 단계(post manufacturing)로 나가야 하는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다"고 덧붙였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다만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 추진은 경계했다. 그는 "한국은 지난 30년 동안의 산업정책을 통해 제조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여러 교훈을 얻었다"며 "앞으로 경제정책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확인하는 것보다는 기술혁신을 위한 기초 R&D에 투자하고 민간이 잘할 수 있도록 투자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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