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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만리장성의 대문' 山海關

동북방 민족과 한족 경계선…만리장성 끝 '노룡두'는 바다속 20m 들어가 끝나

관광객들이 '천하제일관' 현판이 붙어있는 관성 동문을 둘러보고 있다. 산해관은 지난 600여년간 중국과 만주를 가르는 실질적인 경계 역할을 해왔다. /최수문기자


[리빙 앤 조이] '만리장성의 대문' 山海關 동북방 민족과 한족 경계선…만리장성 끝 '노룡두'는 바다속 20m 들어가 끝나 관광객들이 '천하제일관' 현판이 붙어있는 관성 동문을 둘러보고 있다. 산해관은 지난 600여년간 중국과 만주를 가르는 실질적인 경계 역할을 해왔다. /최수문기자 택시가 시가지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성곽이 앞을 가로 막는다.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인해 둘로 분할돼 있다. 우리민족과 만주족등 동북방 민족과 한족(漢族) 등 남방 민족을 가르는 사실상의 경계선인 산해관(山海關)이다. 베이징(北京)에서 정동쪽으로 300㎞ 가량 떨어져 있으며 행정적으론 진황도시(秦皇島市) 산해관구(山海關區)에 속하는 산해관은 하나의 성채이자 만리장성의 동쪽 끝 지역을 통칭하는 명칭으로도 쓰인다. 산해관은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세워졌다. 북쪽에는 연산(燕山)산맥의 줄기인 각산(角山)이 우뚝 서있고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다. '산해'라는 이름은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각산에서 발해까지의 거리는 약 10㎞로 인근 평지로서는 가장 좁은 곳이다. 한족 입장에서는 외적을 방어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산해관은 주성인 관성(關城)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6개의 성채,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장성 성벽으로 이뤄져 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성체가 관성으로, 여기가 내외를 연결하는 주(主)출입구이다. '산해관' 및 산해관의 별칭인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은 이 성체의 동문에 붙어있다. 관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동익성(東翼城)ㆍ서익성(西翼城)ㆍ남익성(南翼城)ㆍ북익성(北翼城)이 있고 위원성(威遠城)이 밖에서 응원을 하며 '노룡두(老龍頭)'가 있는 영해성(寧海城)은 바다쪽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성체를 여러 개 만든 것은 서로 호응하면서 장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벽은 높이 12m에 두께 6m 정도다. 산해관 관광은 주로 천하제일관에서 시작된다. 택시기사에게 "띠이관(第一關)"이라고 하면 한참을 성벽 사이로 달리다가 커다란 누각이 멀리 보이는 매표소 앞에 세워준다. 입장권을 사서 먼저 관성의 정문 위를 올라간다. 성문위에 누각이 있고 누각 서쪽으로, 그러니까 중국쪽으로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이 있다. 대내용 과시인 셈이다. 현판의 크기는 길이가 6m, 너비가 1.5m 정도로 거대한데 글자 하나의 크기도 문짝만하다. 공식명칭인 '산해관'이라는 현판은 성문 동쪽 면에 붙어있다. 실제로 산해관이 중국에서 가장 큰 성문을 아니다. 그럼에도 산해관이 천하제일관으로 알져진 것은 청(淸)의 강희제가 이곳을 지나며 "두 서울을 잠그는데 더할 나위 없는 곳, 만리장성의 첫번째 관문이라"는 시구를 남기면서부터라고 한다. 역사상 조선이 직접적으로 산해관과 연관을 맺은 일은 없다. 명ㆍ청 교체연도인 1644년 산해관 전투에 조선 왕조의 소현세자가 청의 '포로' 신분으로 참전, 기록을 남긴 정도다. 다만 조선은 매년 사신을 중국으로 보냈고 산해관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던 관계로 적지 않은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궁벽한 조선에서 온 유생들에게 산해관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한다. 당시 규모와 짜임새는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쇄락한 유적으로만 남았다. 곳곳이 무너져 흙더미만 남은 곳이 더 많다. 성벽 구조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곳은 전체의 5분의1이나 될까 한다. 중국 정부에서 많은 노력을 들여 보수를 하고 있다지만 훼손되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아직까지 문화재를 '문화재답게' 여기지 않는 중국인들의 여유 없음 때문일 것이다. 산해관을 나와서는 영해성으로 향했다. 노룡두를 보기 위해서다. 만리장성은 발해 바다 속으로 20m 들어가서 끝나는 데 이 보루를 노룡두라고 한다. 장성을 하나의 거대한 용으로 비유, 여기가 바로 그 용의 머리라 해 붙인 이름이다. 성곽을 굳이 바다 속까지 늘인 것은 방어태세가 굳건하다는 상징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노룡두는 명말에야 세워졌는 데 사실상 장성의 마지막 대역사였다. 하지만 명은 이후 80년도 안돼 멸망했으니 허무감마저 느껴진다. 국가는 성벽만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 최대의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곳이다. 산해관 관광의 마지막은 의례 각산이다. 산해관 북쪽에 해발 500m 높이로 산맥이 이어지는 데 처음 만나는 산이 각산이다. 산위를 성벽이 뻗어나가는 데 이것이 각산장성이다. 관광에서 각산이 중요한 이유는 정상에서의 조망 때문이다. 산등성을 따라 가파른 성벽 길을 30분쯤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진 적루(敵樓)가 나온다. 적루는 성벽 중간중간에 있는 외적방어의 핵심시설이다. 적루 위에 올라서면 동쪽의 벌판과 남쪽의 발해가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산해관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흐려서 희미하지만 멀리 바다의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적루에서 곧장 장성을 따라 산꼭대기 쪽으로 오르면 중턱에 절이 하나 있다. 현재 명칭은 서현사(棲賢寺)인데 역사상 각산사로 불리어지던 절이다. 명초에 처음 지어진후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다가 1991년에 지금의 건물형태로 정착했다. 하지만 그래도 산해관을 대표하는 귀중한 사찰이다. 산해관을 찾아가는 길을 주로 베이징에서 출발한다. 시외버스나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산해관구에 정차하는 버스나 열차도 있지만 운행횟수에서는 진황도를 거치는 것이 낫다. 진황도역에서 '천하제일관'까지는 15㎞ 남짓함으로 택시나 시내버스를 이용, 쉽게 갈 수 있다. 산해관으로 살펴본 중국사 만주족 방어하던 최후 보루-의화단 사건때 훼손… 86년 복원 중국이 만리장성을 처음 세운 것은 기원전 3세기말 진(秦) 때지만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명(明)이 들어서고 나서다. 원(元)을 축출한 명은 몽골족의 재침을 두려워해 북쪽 국경선에 장성을 보수했고 이것이 지금까지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산해관이 세워진 것은 1381년이다. 명이 건국된 후 북쪽에서 군사작전을 총지휘했던 사람이 서달(徐達)로, 그는 몽골 및 만주 세력들을 방어할 목적으로 관문 공사를 시작해 1년만에 완공했다. 기존에도 유관(楡關)이라는 관문이 있었으나 서달이 이를 동쪽으로 20㎞ 가량 옮겨 현재 위치에 새로 구축했다. 산해관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한 것은 17세기 만주세력이 강성해져 중국을 위협하면서부터다. 명의 세력은 당초 만주 서부까지 지배하고 있었지만 17세기 들어와 신흥세력인 청에 밀리면서 만리장성까지 후퇴를 했다. 마지막으로 1644년 산해관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이민족 지배아래 들어가게 된다. 당시 청과 대치하고 있던 명의 장수는 오삼계(吳三桂)였다. 마침 이자성 농민봉기로 명조는 내부에서 무너졌는 데 오삼계는 오히려 청과 결탁을 했다. 이자성군과 청ㆍ오삼계군과의 전투가 산해관에서 벌어졌고 이에 승리한 청군이 북경에 입성하면서 만주족이 중국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청의 중국 지배 이후 산해관은 군사적 기능은 약화되고 상징적 관문으로만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중국이 8개국 연합군의 침략을 받으며 결정적으로 파괴됐다. 이런 훼손상태는 1970년대 문화혁명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을 내세워 세계 무대에 새로이 등장한 중국이 1986년 국가정체성을 제고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복원작업을 시작, 지금에 이르렀다. 산해관에 서면 만리장성의 전체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친다. 천하제일관 근처에 장성박물관이 있는데 여기에는 시대별로 중국인들이 구축했다는 북방 장성의 지도가 있다. 만주의 경우 전국시대 연(燕)이 심양(瀋陽)을 우회하는 장성을 압록강까지 쌓았고 이후 명 장성도 압록강변 의주 맞은편의 호산(虎山)장성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는 증거가 없다. 산해관에서 서쪽으로의 경우는 성벽이 남아있고 관문도 있지만 북쪽으로, 즉 만주쪽으로는 유적 자체가 없다. 호산성도 명 시대가 아니라 1500년전 고구려 시기의 산성 유적으로 밝혀졌다. 연이나 명이 만주로 진출한 것은 사실(史實)이지만 당시 세워진 것은 성벽이 아니라 국경목책 수준이었다. 만리장성 운운하며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허풍임을 알 수 있다. 산해관=최수문기자 chsm@sed.co.kr 입력시간 : 2007-06-2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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