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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4월, 이주열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는 35년간 한국은행 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김중수 총재를 향해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순둥이' '남대문사의 스님들'이라는 평가를 받곤 하는 한은 직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전 부총재는 "60년에 걸쳐 형성된 고유의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되면서 혼돈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 개혁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라고 하기에는 제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며 김중수 총재가 휘두르는 칼날에 아무 저항도 못하는 스스로를 개탄했다. 그의 발언은 이내 김 총재를 향한 독설로 향했다. 그는 "개혁 자체가 조직의 목적이나 가치가 될 수 없으며 '이 조직'이 아니라 '우리 조직'이라는 생각으로 대다수 구성원을 끌어가는 방향으로 변화가 모색되기를 당부드린다"고 말한다. '이 조직'은 김 총재가 한은을 지칭할 때 자주 쓰던 표현이었다. 취임 초기 한은 내부에서 "총재가 점령군이냐"며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됐던 바로 그 문구였다.
한은 통화정책 신뢰도 추락 심각
퇴임사를 접한 김 총재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김 총재는 간부회의에서 퇴임식 발언 하나하나를 지적했다. '60년에 걸쳐 형성된 고유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됐다'는 평가에 대해 "과거 어느 때에 비해 한은의 독립성이 침해되지 않았다는 답변으로 대신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부총재는 퇴임 이후 화재보험협회 이사장에 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시장에서는 인선 바로 직전 김 총재가 이를 막았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그리고 2년 후, 이 전 부총재는 '총재'가 돼 화려하게 돌아왔다. 그의 내정 소식에 한은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비단 한은 내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내정자가 재직 시절 한은 식구들을 자식처럼 아꼈고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통화정책의 신뢰를 어느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점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 내정자가 지금 이 순간 행복만을 만끽하고 있기에는 상황에 대한 엄중함이 너무 크다. 사실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은행은 만신창이가 됐다. 한은의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유례없을 정도로 추락해 있다. '청개구리 중앙은행'이라는 자괴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시장은 한국은행을 믿지 않고 있다. 때로는 시장이라는 주체가 엉뚱하게 판단한 탓도 있지만 그 또한 한은의 평소 신뢰도가 떨어진 데서 발생한 일이다. 글로벌금융위기 직전은 물론이고 이후 경기 부양과정에서 보여온 한은의 통화 정책은 일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일관성이 떨어지고 실망감을 안겨줬다.
여기에는 역대 총재들만의 책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내정자도 3일 내정 발표 직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통화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진 것에 나 자신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오늘날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위상을 추락하게 만든 책임자 중 한 명인 것이 사실이다.
이는 역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청문회 절차가 남아 있지만 이 내정자는 취임사를 통해 통렬한 자기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앙은행의 과거 통화 정책 과정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던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일할 것임을 맹세해야 한다. 이 내정자도 이날 통화에서 "중앙은행은 국민의 신뢰가 유일한 존립기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민·시장 이해할 수 있는 정책을
더욱 중요한 것은 '신뢰'가 단순히 말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본인 스스로 "앞으로 내다보기가 쉽지 않다. 통화 정책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지만, 이 또한 언제까지 이해를 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몇 수 앞은 보지 않더라도 일반 국민과 시장이 '이해'는 할 수 있을 정도의 상식적인 통화 정책은 만들도록 해야 한다. 비록 '기획재정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오명을 듣더라도 한국은행이 왜 중앙은행인지를 국민이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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