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에너지 분야에서 '중국 중심축(pivot to China)'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제재에 대한 맞대응 카드로 조만간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에 오르는 중국 수출 비중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양국의 에너지 밀월이 가속화할 경우 유럽 에너지 수입 가격이 오르고 미국의 중동 의존도가 더 커지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 재편은 물론 외교적·지정학적 변화까지 촉발할 것으로 전망된다.
25일(현지시간)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크림자치공화국 사태를 계기로 세계 최대 원유생산국인 러시아가 대중 에너지 수출증가에 드라이브를 걸었다"고 전했다. 실제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러시아 최대 석유업체인 로스네프트의 이고르 세친 회장은 최근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해 에너지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또 로스네프트는 중국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 확장공사 계획을 최근 승인했다. 러시아 최대 천연가스 업체인 가스프롬도 이달에 중국과 500억달러가량을 투자해 가스 파이프라인을 설치한다는 데 합의할 예정이다.
이미 러시아의 지난달 대중수출은 가파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은 272만메트릭톤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10년 전의 3배 물량이다. 또 중국의 원유 수입 가운데 러시아산의 비중은 12%로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갔다. 미국 외교협의회(CFR)의 로버트 칸 선임 연구원은 "잠재적인 유럽 시장 감소 위협에 대비한다는 차원 외에 중국 수출증가는 러시아의 장기목표"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시진핑 중국 주석이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러시아를 택하면서 양국의 에너지 협력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해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CNPC)은 러시아 로스네프트와 향후 25년간 2,700억달러어치의 원유 공급 계약을 맺고 200억달러를 선지급했다. 로스네프트는 지난해 8월에도 중국석유(CPC)와 향후 10년간 850억달러 규모의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두 계약을 합치면 하루 62만배럴 규모로 기존의 러시아 최대 수출국인 독일과 맞먹는다.
반면 러시아는 CNPC에 아시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원유 매장지역 가운데 하나인 북극해의 3개 광구 탐사권을 허가했다. 런던에 위치한 국제전략연구소의 니컬러스 리드먼 선임 연구원은 "중국이 러시아 에너지 기업에 투자하고 인프라 건설에 선금을 지급한 것은 양국 간 경제협력에 크나큰 진전"이라며 "러시아는 유럽화보다 유라시아 모델을 선호하고 있어 앞으로 유럽과 더 거리를 두려 할 것"이라고 전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다변화 정책이 성공할 경우 유럽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러시아산의 가격이 항구로 들어오는 선박 에너지 가격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미국이 자국 천연가스의 일부를 EU에 수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지만 가격상승은 불가피한 셈이다. EU는 원유 수입의 32%, 천연가스는 34.5%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고민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원유 소비의 40%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고 러시아에서도 지난해 1억6,750만배럴의 원유를 수입했다. 피터 모릭 메릴랜드대 교수는 "지난해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생산량의 45%를 미국에 공급했다"며 "미국의 중동 의존도가 더 심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이 앞으로 10년 뒤쯤 에너지 자립국이 될 때까지 이란 핵 협상 등 외교 문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의 발언권이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 같은 에너지 시장의 지각변동이 단기간에 일어나기는 힘든 상황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 등 인프라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는 중국 시장을 놓고 중동·서부아프리카 등과 경쟁해야 하고 미국도 셰일혁명에 힘입어 시장점유율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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