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이 '규제완화' 천지다.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위한 끝장 토론회를 가진 직후 모든 정부부처가 규제완화에 골몰하고 있다. 이의를 제기하는 공무원은 역적으로 몰릴 분위기다. 방향이 아무리 옳다 해도 이건 마뜩잖다. 한 가지 가치에만 매몰되는 규제완화라면 위험하다. 더욱이 '규제완화'라는 언어가 주는 매력과 포퓰리즘이 결합하는 경우라면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규제완화를 추진했던 시절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정확히 21년 전 이맘때쯤,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규제완화를 밀어붙였다. 지지율 90%를 넘는 대통령이 '경제 규제는 부패와 연결돼 있다'며 진두지휘하고 나섰으니 정부부처는 물론 한국은행과 은행·증권·보험감독원에도 비상이 걸렸다. 청와대는 정부부처에 모든 규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다그쳤다. 공무원들은 밤새워 일했다. 경제단체들은 마치 채권자처럼 규제완화 목록을 들이밀었다.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태산명동(太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식으로 성과는 미미한 채 한국은 미증유의 국가부도 위기를 맞으며 결국 외환위기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 대통령과 경제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지목받는 YS를 비교하는 게 불온하게 비쳐질지도 모르겠으나 두 정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언어의 강도는 예전이 지금보다 셌다. '규제개혁' 정도가 아니라 '규제 혁파'라고 강조했었으니까. YS는 '규제완화만이 살길'이라는 명제도 던졌다.
물론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규제개혁은 이전과 성격이 다른 점도 있다. 규제개혁의 시대적 당위성과 절박함에도 동의하고 박 대통령의 진정성도 믿는다. 문제는 몰이해(沒理解)와 몰가치성(沒價値性).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 사흘 만에 규제를 없애버리는 행태는 규제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명분이 충분해도 절차와 규정에서 벗어나는 막가파식 규제완화는 과도한 기대심리와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뽑아버려 국민의 박수를 받았지만 관련 부처인 산업자원부와 한국전력, 지방자치단체들은 실용정부 임기 내내 멀쩡한 전봇대를 뽑거나 옮겨달라는 민원에 시달렸다.
규제완화가 필요해도 규제 자체를 '원수'나 '암덩어리'로 보는 시각도 옳지 않다. 호주국립대 존 브레이스웨이트 교수는 정부의 경제적 규제를 다룬 '글로벌 비즈니스 레귤레이션(2000)'에서 규제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와 중국 진나라로 꼽는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법을 만들고 도량형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중화민족국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최소한의 규제나 착한 규제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는 자연상태(토머스 홉스)'를 극복하는 장치다. 공짜로 풀을 먹이려는 목동이 몰리는 임자 없는 목초지가 가장 먼저 황폐해진다는 게릿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도 규제완화의 역설을 말해준다.
현실 속에서 공유지의 비극에 비견될 사례는 무수히 많다. 1929년의 대공황과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경제 출현 이후 전통적인 자유방임과 규제를 죄악시하는 신자유주의의 후유증으로 불거졌다. 행정학에서 규제행정의 시발을 1930년대로 꼽는 이유도 규제가 위기극복의 수단이었음을 대변한다. 경제규제가 1930년대에서야 마련되고 2008년 위기 이후에 각국 정부의 개입이 강해진 것도 시장의 실패 탓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대목은 포퓰리즘과 결합하는 조짐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공무원 사회가 기득권 수호를 위해 규제를 움켜쥐는 집단이라는 분위기와 중세 마녀사냥이나 공산주의의 인민재판과 뭐가 다른가. 박 대통령이 공정거래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규제를 들여 규제완화의 균형을 주문한 점은 다행스럽지만 분위기는 영 아니다. 필요하더라도 순식간에 해치우는 규제완화는 폐단을 낳기 마련이다. 이가 상했다 치자. 치과에서 원인을 따지고 치료로 안 되면 마취 후에 발치할 일이지 목수의 망치나 펜치에 생이빨을 다급하게 내밀어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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