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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로만손 김기문사장] 창업10년 `한국시계대명사' 키워

「80년 독일계 건설회사의 인부로 「열사의땅」 중동에 간 26살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자기가 만든 시계를 들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또한번 강산이 변할때쯤에 그는 중동지역 시계시장을 손아귀에 쥐었다.」그의 젊은날 20여년을 이 세 문장으로 축약하겠다면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이 이만큼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운이 아닐까. 김기문(45). 한국 시계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로만손을 키워낸 사람이다.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OEM)에 머물러 있던 한국시계를 자가브랜드로 당당하게 세계시장에 등단시킨 인물이다. 그가 이룩한 시계나라 「로만손」은 98년 수출 2,500만달러를 포함해 310억여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수년째 흑자기조를 이어온 것은 물론이다. 충청도 가난한 종가집 종손으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하는 아픔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돈때문에 가족을 두고 타국으로 떠야야 했을까. 당당한 그의 지금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다. 인간적이다. 그를 알고 나면 꿈을 꿀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김기문 사장이 빚어낸 로만손은 10년이라는 짧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두바이·이스탄불 등 중동지역에서 최고의 시장점유율을 이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다. 로만손이라는 이름은 이미 해외 50여개국에 상표로 등록되어 있다. 40여개국에는 정기적으로 물건이 나간다. 중소기업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성과다. 시계의 원산지인 유럽에서조차 로만손이 같은 매장에서 진열되는 모습에 아연 긴장할 정도다. 비결이 무엇일까. 金사장을 아는 주변사람들은 우선 「배짱」을 든다. 그는 시계를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풀어낼 줄도 몰랐다. 수출을 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뛰어들었다. 金사장은 『한때는 돈키호테같은 망상가라고 조롱받기도 했다. 브랜드에 대한 인식조차 부족했던 시절부터 브랜드장사를 시작하겠다고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이런 도전정신 뒤에는 일을 좋아하고 현실에 맞부딪치기를 즐겨하는 그의 성격이 있다. 그는 사장이면서도 사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직원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헤쳐나가면서 행복해한다. 金사장이 즐겨 쓰는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시작도 그랬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노동자로 일할때부터 그의 성실성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독일인이 그에게 홍콩에 있는 아시아본사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의했다. 남다른 면을 갖지 않았다면 좀체 일어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홍콩으로 떠나기 전날 부친상을 당했다. 金사장은 『그때 비행기를 탔더라면 오늘의 로만손도, 김기문도 없었을 것이다』며 드라마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우연한 기회에 솔로몬시계라는 회사에 창업멤버로 참여했다. 金사장은 『일을 하려면 두발을 담그고 빠져야 한다.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했다. 영업이사를 끝으로 솔로몬과 이별하고 창업을 결심했다. 창업자금 5,000만원도 『金사장이라면 뭔가 해낼 것』이라며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을 믿고 주변사람들이 빌려줬다. 이것만으로는 金사장을, 로만손 이야기를 다했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 주어진 상황을 풀어가는 감각이 있다. 고통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이 있다. 金사장은 『로만손의 성공은 지극히 단순하다. 벽에 부딪칠때마다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이었을 뿐이다』고 설명한다. 88년 4월 회사를 만들고 시계시장을 조사했다. 국내에는 오리엔트·아남·삼성 등이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20~30개 군소업체들이 나머지 20%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하고 있었다. 신생업체로서 국내 시장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시작부터 「바다 건너」를 바라보았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로만손」이 된 사연이다. 중동지역을 찾아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동은 석유빼고 다 수입한다. 시계도 그랬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매출 400억원대를 기대하는 중소기업으로서 수출선을 40개국까지 늘릴 수 있었던 것은 「걸프전」이 준 가르침이다. 『91년에 걸프전이 터졌다. 수출물량의 90%를 차지했는데 신용장 네고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시장다변화에는 혼자만의 독특한 상품이 필요했다. 아직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디자인을 찾았다. 고민끝에 나온 작품이 「커팅글래스(CUTTING GLASS)」다. 『보석 이미지를 시계에 접목시켜 보자는 생각이었다. 시계 유리를 각지게 깎아 만들었다. 미국시장에 들고 갔더니 뉴욕 맨하탄 브로드웨이가 불이 난 듯 했다. 날마다 값을 올려도 물건을 만드는 대로 보내달라는 팩스가 끊이지 않았다.』 金사장은 이때를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로만손의 토대가 단단하게 굳어진 것도 커팅글래스 덕이었다고 한다. 이런 호시절도 잠깐. 1년쯤 지나자 홍콩·대만 등에서 모조품이 쏟아졌다. 『아! 브랜드를 키워야 한다.』 한때 일본에 OEM 수출을 하다 엔화가 오르면서 한 순간에 판로가 막혔던 경험때문에 독자상표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큼 강한 충격은 아니었다. 로만손은 1년이면 10~15번 가량 세계적인 시계나 보석박람회에 얼굴을 내민다. 홍콩 스타TV, 영국 BBC 등에 연간 300만달러 이상을 쏟아 붓기도 한다. 金사장은 이제 토털브랜드를 꿈꾼다. 「패션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다. 『웬만한 나라에선 로만손 하면 시계로 안다. 이를 활용해야 할때가 됐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시계 론진은 안경도 하고 스카프도 한다』는 것이다. 핸드백을 처음으로 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늘려가진 않을 방침이다. 金사장은 『품질관리를 철저히 할 것이다. 로만손에 흠이 생기지 않게 할 것이다. 다음 상품은 핸드백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린 다음에 생각하겠다』며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金사장 사무실을 비롯해 로만손 건물 곳곳에는 「제2기원년 세계화 일류화」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밀레니엄 시대를 맞겠다는 뜻이다. 21세기 로만손의 모습을 물었다. 金사장은 『주식시장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에 로만손 제품만을 파는 전문매장을 들어서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최연소 한국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서 한국에 타임스퀘어 빌딩을 세우겠다는 말도 곁들였다. 새해 첫날 젊은 사람들이 몰려 드는 명소를 만들겠다는 金사장. 그의 한걸음 한걸음이 궁금하다.【박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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