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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별기획] 마흔일곱 서울경제 '청년기' 되찾았다

한은, 본지 창간호부터 80년 강제폐간 종간호까지 신문 기증<br>강제폐간으로 지령 6,390호·신문철 99권서 멈춰<br>정확한 현안진단·대안제시 경제관료에도 훌륭한 나침반<br>한은 "최초의 경제지로 자료적 가치크다" 의미 부여

서울경제 충무로 사옥 사장실에서 임종건(왼쪽) 서울경제 사장과 신문 기증차 방문한 송창헌 한국은행 부총재보가 60년대 본지 기사를 보고 있다. /김동호기자

우리 경제의 근대화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서울경제의 청년기가 한국은행 자료실에서 또 한번 복원됐다. 한은이 지난 60년 8월1일 창간부터 80년 11월25일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기까지 20년치 신문을 보관하고 있다가 서울경제에 기증한 것이다. 서울경제가 88년 8월1일 복간돼 올해 47주년을 맞이하며 장년기에 접어든 점을 감안하면 본지의 유년기와 청년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지령 수는 총 6,390호. 한은이 제본한 신문철 수는 공교롭게도 총 99권이었다. 100권을 못 채운 게 20년간 최초의, 최고의 경제지로서 전성기를 누리다가 성년이 되자마자 세상에서 사라진 서울경제의 운명을 연상하게 했다. 김영환 한국은행 정보자료실 차장은 “경제지 가운데 가장 먼저 창간돼 상당한 자료적 가치가 있어 기록문화 축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보관량도 많고 상태도 양호하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증된 신문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국민적 염원과 서울경제의 각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까지 우리 경제의 성공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첫 페이지를 장식한 창간사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국민경제의 전체적 발전을 위하고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편에 서서 이 나라 경제 ‘저널리즘’을 정상(正常)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데 일조가 될 것을 다시 한번 맹세하는 바이다.” 서울경제는 당시 우리나라의 작은 경제 규모나 열악한 경영환경, 국민들의 경제상식 부족 등으로 경제지는 성공할 수 없다는 세간의 인식에 정면 도전했다. 본지는 창간사에서 “한국적인 경제풍토 위에서는 본격적인 종합경제지의 발행이란 모험이라는 정설을 뜯어고칠 기백으로 서울경제의 탄생을 당당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창간호의 톱기사는 ‘경제 9월 위기 갈수록 심각화, 물가 15% 앙등, 생산 3.8% 위축’이라는 제목에서 보듯 4ㆍ19 혁명 이후 경제혼란에 대한 우려로 채웠다. 박승 한은 전 총재는 “우리 국민들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급급한 그때 서울경제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창간한 그 자체가 선구자적인 업적”이라고 말했다. 이후 서울경제는 우리 경제가 60년대 이후 적극적인 대외지향 전략으로 고속성장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현안을 정확히 진단하는 한편 대책 제시에도 노력했다. 서울경제의 기사들은 경제학도는 물론 경제관료들에게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젊은 시절 고시를 준비하면서 서울경제를 통해 경제를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실제 한은이 기증한 서울경제를 펼쳐보면 우리 경제사 그대로다. 60년대에는 61년 7월22일 경제기획원 설립, 62년 1월5일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63년 1월5일 신상법(新商法) 발효, 64년 11월30일 수출 1억달러 목표 달성, 65년 9월30일 금리 현실화 조치, 66년 8월3일 외자도입법 공포, 67년 4월15일 GATT 가입, 68년 11월8일 자본시장육성법 제정, 69년 9월4일 23개 부실기업 정리 등 주로 한국 근대화의 맹아가 형성됐다. 70년대는 오일쇼크 등의 위기를 극복하고 고속성장을 달성한 시기였다. 70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 기공과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에 이어 71년 9월8일 국토종합개발 10개년계획 확정, 72년 4월11일 새마을운동 시작, 73년 10월16일 1차 오일쇼크, 74년 1월14일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75년 12월5일 중동건설 촉진 방안이 이어졌다. 이어 76년 9월14일 국민의료시행 확대방안 확정, 77년 7월1일 부가가치세 도입, 78년 10월 중동수출붐, 79년 4ㆍ17 경기안정화종합대책, 80년 8월20일 국보위 중화학공업 분야 투자조정 단행 등에 대해 서울경제는 심도 깊은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송창헌 한은 부총재보는 “유서 깊고 독보적인 경제지로서 정책 수행이나 업무, 여론과 피드백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80년 서울경제는 경제 전문지 중 시장점유율 43%(발행부수 13만부)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호사다마일까.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바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하면서 80년 11월25일 종간호를 끝으로 한국일보에 흡수된 것이다. 당시 서울경제는 종간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종간에 즈음하여 우리는 그동안에 크게 발전한 우리나라 경제가 다다른 고지를 보고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의 말석에서 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동시에 그 동안에 서울경제를 사랑하여 아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혹은 잘못을 꾸짖어주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당시 비상계엄하의 검열 앞에 서울경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억울함을 무미건조한 문장 몇 개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박 전 총재는 “불편부당한 논조, 기사의 객관성과 정확성 등이 좋아 ‘나의 신문’이라 생각하고 있다”며 “멀쩡한 신문이 폐간된 게 가슴아파 개인적으로 종간사를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게 한은과 서울경제의 오랜 인연이다. 서울경제를 창간한 고 백상 장기영 사주는 1934년 조선은행(한은의 전신)에 입행한 뒤 48년 한은 조사부 부장으로 승진했고 50년부터 52년까지 한은 부총재를 맡아 전시금융 수습에 진력했다. 이 같은 인연도 한은이 서울경제를 장기간 보관하는 데 한몫 했다는 게 한은 안팎의 지적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장기영 사주는 김정렴 선배(한은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등 역임)와 함께 당시 총재의 직접 지휘를 받으면서 한은법의 기틀을 만들었다”며 “사주와의 인연 탓인지 한은 직원들이 서울경제의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개발시대부터 우리 경제를 다뤄온 공적이 크다”며 “8년 만에 복간되면서 상당히 어려운 일이 많았을 텐데 앞으로도 계속해 좋은 경제신문으로 발전하기를 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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