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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없는 주민자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가 올해 첫 도입한 주민참여예산제 얘기다. 이름 그대로 예산 편성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권한을 위임했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자치권을 강화하는 첫 발걸음을 뗀 것이다.
지난 달 선발된 250명의 시민 예산위원들은 내년 서울시 예산은 물론 중장기 예산편성, 대규모 투자사업에 대해 참여예산위원회의 이름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또 주민 제안 사업으로 배정된 500억원을 어디에 쓸 지도 직접 정할 수 있다.
주민참여예산제는 1989년 인구 130만 명의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시에서 처음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2004년 광주광역시 북구가 최초로 도입했고, 경기도 등 광역 지자체로도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 1,000만, 연간 총 예산 22조원의 거대도시가 주민참여 예산을 전격 시행하는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서울시의 첫 걸음이 예산 활용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높이고 실질적인 효율성까지 가져올 수 있을 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7시, 장맛비가 내려 촉촉히 젖은 땅을 밟고 서울시청 후생동 4층 강당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금요일 저녁, 집으로 가기 바쁜 시간임에도 이들이 이 곳에 모인 이유는 서울시 주민참여예산학교 야간반 2일차 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대학생부터 정장을 입은 직장인, 가정 주부,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까지 70여명의 시민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강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예산학교는 평일 주ㆍ야간반, 주말반으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이날 열린 야간반은 일을 마치고 온 직장인들이 많아 보였다.
교육 주제는 '서울시 예산 분석 및 평가기법'과 '사업제안서를 만드는 방법'. 이틀 전 첫 교육에서 주민참여예산 개요와 운영방식, 서울시 예산 등에 대해 한 번 접해봤기 때문인지 시민들은 많이 익숙해진 듯한 표정이었다. 특히 이날 후반부에 열린 예산안 평가 실습 과제에서는 학생시절로 돌아간 듯 모둠별로 열띤 토론을 펼쳤으며 곳곳에서 박수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교육에 참석한 이미자(44ㆍ여)씨는 "평소 시 정책결정 과정에 관심이 많아 예산위원에 지원했다"며 "서울시 예산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도록 목소리를 내고 첫 시작하는 주민참여예산제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외국인 예비 위원도 눈에 띄었다.
서울생활 4년차인 일본인 무로야마도카(31ㆍ여)씨는 "내 생각이 서울 시정에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워 지원했다"며 "(외국인이라)원래 투표권이 없는데 이번 참여위원이 되면서 투표권을 가진 듯 한 기분이다"라고 웃음지었다.
서울시 참여예산제에서 규정하는 주민에는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외국인은 물론 직장이 서울에 있는 경기도민들도 참여예산위원 자격이 주어진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위원은 모두 250명이다. 150명의 시민 위원은 지난 달 공개추첨에서 1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나머지 100명은 서울시ㆍ서울시의회ㆍ시민단체ㆍ자치구 주민위원회 추천인으로 구성됐다.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시의원ㆍ예산 전문가ㆍ공무원 등으로 짜여진 지원협의회도 만들어졌다.
지난 주까지 교육을 수료한 예비위원들은 오는 14일 서울시 인재개발원에서 정식 위촉돼 공식 활동을 시작한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참석해 위원들에게 직접 위촉장을 건네고 현장 간담회도 할 계획이다.
위원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권한은 서울시가 주민제안사업을 위해 내놓은 500억원의 용도 결정이다. 오는 15일까지 각 자치구와 주민들이 사업을 제안하면 시민 예산위원들은 각각 경제산업ㆍ문화체육ㆍ여성보육ㆍ도시주택 등 8~9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해당 사업을 예비 심사한다.
예비심사를 통과한 사업들은 250명 전원이 참석하는 총회에서 위원들의 투표로 1등부터 순위를 매긴다. 우선순위에 뽑힌 사업 예산안은 시의회에 제출되고, 의회가 승인하면 시민이 고른 사업이 실제로 집행된다. 일부 자치구는 20억원 이상의 사업비를 가져갈 수 있고 반대로 평균에 훨씬 못 미치는 자치구도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더 타당하고 충실한 사업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지역간 경쟁을 유도할 것으로 분석됐다.
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권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시의 중장기 예산편성과 신청사 건설 같은 대규모 투자사업 예산에 대한 의견도 위원회의 이름으로 제시할 수 있다. 주민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ㆍ토론회도 열 수 있다.
서울시와 서울시의회 입장에서는 시민의 이름으로 시정 전반을 견제하는 까다롭고 힘있는 감시자를 하나 더 둔 셈이다. 김상철 지원협의회 위원은 "다른 지자체와 달리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제 조례에는 의견 제출권이 포함돼 기능이 크게 강화됐다"며 "시민 위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서울시 살림살이에 더 많은 주민 의견을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사회 전반에 참여 문화를 급속히 전파해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할 수도 있다. 실제로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시는 참여예산 도입 이후 교장 선출이나 시립 탁아소 운영에 까지 주민들이 나서고 있는 등 주민조직 수가 참여예산 실시 이후 40%나 증가(2004년 3,000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 예산제 모범사례로 꼽히는 또 다른 도시 스페인의 알바세테와 독일 리히텐베르그 역시 시민 참여공간이 확대되고 지역 주민 공동체가 강화되는 등 참여민주주의가 성숙해지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송창석 희망제작소 부소장은 "지역 주민간 만남과 토론의 활성화로 커뮤니티를 복원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남시는 의회 야당인 민주통합당이 주민참여예산제 조례안을 발의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새누리당이 반대해 통과되지 않고 있다. 박창순 성남시의원은 "부결된 주민참여예산제 조례안을 다시 발의할 계획이지만 민주통합당 출신 현 이재명 시장이 측근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이유로 새누리당이 반대해 통과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울산 남구의 경우 조례안 중 주민참여위원회 구성 근거를 두자는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의견과 이를 반대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팽팽히 대립 중이다. 행정안전부가 배포한 조례 모델안에 따르면 1안은 '위원회 등을 둘 수 있다'는 권고 수준인 반면 2ㆍ3안은 '둔다'는 의무 사항이다. 구청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1안을, 진보당이 2안을 주장하는데 상임위 위원이 3대 3으로 같아 처리가 늦춰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례를 만든 나머지 지자체들도 위원회를 두지 않는 모델 1안을 따르거나 위원회를 운영하더라도 지역내 통ㆍ반장, 이장을 동원하는 등 실질적인 주민참여예산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서울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1안을 채택한 곳이 서초ㆍ강남ㆍ송파 등 8곳이나 된다.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은 "지자체 대부분은 주민의 의견을 수렴만 하는 정도이지 정작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며 "무늬만 주민참여예산제도"라고 비판했다. 지자체의 주민참여예산제 실시가 더딘 가장 큰 이유는 의회의 반대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산을 심의하고 지역구 사업을 챙기는 지자체 의원들의 고유 권한이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주민참여 예산은 예산 편성과정에 시민들이 참가하는 것으로 예산을 심의하고 확정 짓는 의회의 고유권한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주민참여예산제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이제 막 제도가 시작된 만큼 정착과정을 면밀하게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의회가 권한을 일부 내준 것을 돌려놓기 위해 조례를 다시 개정할 수도 있어 상황을 지켜보며 추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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