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53으로 따낸 수순은 흑의 권리이자 교묘한 응수타진이었다. 백으로서는 기왕에 공격나팔을 분 마당이므로 백54로 파호하게 되는데 이 수순을 확인하면서 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흑53으로 따낸 수순은 결정적인 노림수 하나를 품고 있다. 백56으로 공격하기 전에 참고도1의 백1과 흑2를 교환하는 것이 끝내기로는 확실히 백의 이득이다. 그러나 그 수순을 치렀다가는 흑의 노림수가 즉시 터지게 된다는 사실. 흑4,6으로 좌변 백대마가 졸지에 숨이 끊어지게 된다. 이 정도의 수읽기는 프로에게 지극히 기초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창호는 끝까지 좌하귀를 건드리지 못했다. 백이 68로 나와 70으로 끊은 끝내기는 진작부터 노리던 것이었으나 흑은 그 보상으로 중원을 큼지막하게 점령했으므로 아무 불만이 없다. 던질 무렵에는 흑이 덤을 내고도 10집은 족히 남기는 큰 차이였다. 이 바둑의 승부는 서반 좌변 전투에서 이미 판가름이 났다는 것이 검토진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참고도2의 흑1로 젖히자 백은 2에서 12까지로 좌변을 살렸는데 그 수순이 너무도 굴욕적이었던 것이다. 웅크리고 또 웅크리면서 쌈지를 뜨고 산 것은 이창호 나름의 최선이었겠지만 웅크려도 너무 웅크렸다. 백8로는 9의 자리에 나가 흑3점을 잡았어야 했던 것이다. “최근에 이창호가 이세돌에게 4연승을 거두었거든요. 이창호는 참고 또 참으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참았어요.”(양재호) 193수끝 흑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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