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을 의미하는 '그렉시트(GrexitㆍGreece+exit)'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면서 글로벌 자금이 피난처를 찾아 대이동하고 있다.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독일ㆍ미국ㆍ일본 국채 가격은 치솟는 반면 주식과 상품시장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해 유로존 위기가 불거진 후 안전자산 선호현상은 지속돼왔지만 유럽이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대비하는 수순에 이르자 극단적인 '패닉'수준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
독일 정부는 23일(현지시간) 2년 만기 국채를 입찰을 통해 사상 처음으로 45억6,000만유로(58억달러)어치 발행했다. 이번에 발행된 채권은 사상 처음으로 표면금리가 0%인 제로쿠폰이었지만 수요는 넘쳐났다. 시장에서도 2년 만기 독일 국채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인 0.02%까지 떨어졌으며 10년물은 1.384%, 30년물도 1.997%로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유로존 위기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 따라 독일 국채는 조만간 마이너스 금리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운용규모가 1,130억달러인 이그니스애셋매니지먼트의 스튜어트 톰슨 펀드매니저는 "패닉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당연히 안전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며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면 안전자산인 독일 국채는 마이너스 금리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 HSBC는 그리스 사태 등으로 유로존이 붕괴되고 독일이 마르크화로 복귀하면 2년 만기 독일 국채 금리는 -1~-0.5%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환차익까지 감안하면 30~50%의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일부 투자자들은 독일 국채 입찰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반면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는 유로존 위기가 심화할 경우 독일의 재정건전성도 장담할 수 없다며 최근 수개월간 독일 국채의 비중을 줄였다고 밝혔다. 이는 독일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견해로 유럽 위기를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는지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 안전자산인 미 국채도 수요가 몰리면서 수익률이 사상 최저 수준에 다시 근접해가고 있다. 이날 10년물 국채수익률은 전일 대비 3bp 하락한 1.74%를 기록했다. 역대 최저는 지난해 10월 기록한 1.67%다.
위험국가들의 국채는 내던지고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국가들의 국채에만 수요가 몰리는 것이 글로벌 자금시장의 흐름이다. 유럽에서 국가규모가 크지 않은 핀란드ㆍ노르웨이ㆍ스위스 등의 국채가 각광 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전세계 주식시장과 상품시장은 유로존 위기에 투자자들이 떠나가면서 맥을 못 추고 있다. 투자자들이 위험성이 높은 자산을 매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FTSE100지수는 전일에 비해 2.53%, 떨어졌고 프랑스의 CAC40, 독일의 DAX30지수도 각각 2.62%, 2.33% 하락했다. 뉴욕주식시장은 이날 장 막판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상회담 소식으로 매수세가 몰려 낙폭을 줄이기는 했지만 최근 들어 약세흐름을 지속하고 있다.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도 추락하고 있다. 유로화는 이날 유로당 1.258달러를 기록하며 2010년 7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로버트 신치 RBS증권 스트래지스트는 "주가ㆍ금리 등의 기술적 지표들을 감안할 때 단기적으로는 유로당 1.22달러가 바닥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달러화는 엔ㆍ파운드ㆍ스위스프랑 등 다른 주요 국가들의 통화에 대비해서도 모두 강세를 보였다.
원자재 가격은 급락하고 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은 전날 종가보다 1.95달러(2.1%) 떨어진 89.90달러를 기록했다. WTI 선물가격이 90달러 아래로 내려간 것은 지난해 10월 이후 처음이다. 금값도 유럽에 대한 우려로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6월 인도분 금은 전날 종가보다 28.20달러(1.8%) 떨어진 온스당 1,548.40달러를 기록했다. 금은 안전자산으로 꼽혔지만 주요 선진국들이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는 제로금리 상황에 이르고 투자수요가 줄어들면서 약세를 지속하고 있다.
산업용으로 주로 사용돼 글로벌 경기의 바로미터 구실을 하는 구리 가격도 파운드당 9.10센트(2.6%) 떨어진 3.3960달러로 올 들어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그리스뿐 아니라 위기징후가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금유출에 대한 경고도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스페인ㆍ이탈리아ㆍ포르투갈 등에서 아직 뱅크런 조짐은 없지만 대신 국채 및 회사채시장에서 외국인투자가들이 빠져나가는'본드런(bond run)'이 지난해 이후 계속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JP모건 분석에 따르면 지난 9개월 동안 외국인투자가들은 이탈리아에서 2,000억유로, 스페인에서 800억유로의 국채 및 회사채를 팔고 떠났다. 이는 각각 시장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이 신문은 외국인 투자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유럽시장이 유대인들의 격리구역을 의미하는'게토(ghetto)'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유로존 국가들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 단호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경제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회원국이 유로존을 떠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가 탈퇴했을 때의 파장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처럼 전세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뉴욕 본사에서 개최한 한국 특파원들과의 기자간담회에서 유로존을 위기에서 구할 자금은 충분하지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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