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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시스템 후진국의 비극

오래전에 본 미국 할리우드 영화 한편이 생각이 난다. 타이틀은 잊었지만 여건이 바뀌어 역할과 중요도가 떨어져 어려움을 겪게 된 모 정부기관이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국가적 위기상황을 조장해 예산과 인력을 늘리는 데 성공한다는 스토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디까지나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니까 스토리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꽤 설득력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정부부처나 기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선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명분과 이유를 내세워 조직을 키우고 예산과 인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극성을 부릴 때는 볼썽사납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이기적 현상자체를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문제는 조직과 예산, 권한만 커졌지 꼭 해야 할 기본적인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거나 정작 필요한 때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기구나 조직들이 많다는 점이다. 국보1호 숭례문이 불타 없어지는 어처구니없고 참담한 사태가 벌어졌다. 소중한 국보가 70대 노인 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불질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방치돼왔다는 점, 간단한 방재매뉴얼은커녕 관련기관 간에 손발이 안 맞아 진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 등 하나하나 따져 들어가면 말 그대로 ‘총체적 부실’이다. 문화도시ㆍ관광도시 등의 상투적인 구호들이 난무하고 문화재를 마치 자기 생명이나 재산보다 더 아끼는 것처럼 행세하는 관련자들이 한번쯤 현장을 둘러보기만 했어도 방화의 위험성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걸 안 한 것이다. 권한을 행사할 때는 언제고 문제가 터지자 엉뚱하게 사설 경비업체에 화살을 돌리는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대형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책임 떠넘기기, 예산과 인력타령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다. 성수대교ㆍ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그랬고 가스관폭발사고,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태안원유유출사고 때도 그랬다. 누구 하나 책임지는 모습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이번에도 예산타령이 나오자 어느 시민은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엎기로 낭비를 일삼으면서 예산이 없어 국보1호 관리를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개한다. 쓸데없이 말뚝박고 울타리치기 등으로 길거리는 예산낭비 전시장이나 다름없고 한적한 시골길까지 값비싼 과속단속카메라들이 깔려있는 나라에서 국보급 문화재 관리에는 그토록 인색했다니 뭔가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다.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후속조치도 요란스러울 것으로 짐작된다. 늘 그래왔듯이 문화재관리 관련 규제가 대폭 강화되고 일제점검이다 뭐다 해서 법석을 떨고 예산과 조직이 크게 확대될 것이다. 뻔한 레퍼토리처럼 판에 박힌 관료적 처방이 되풀이되다 보니 큰 사건이 한번 터지면 관련 부처 또는 기관들의 형편이 크게 좋아진다는 말까지 나돌게 됐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대형사고가 터지면 너도나도 나서 열을 올리는 바람에 해당업무나 기관들에는 권한을 키우고 예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뜻이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겉치레용 땜질식 처방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이번 숭례문 소실사건의 본질은 관련 기관이나 조직들은 있지만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질적인 책임 떠넘기기는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평소 권한이나 행사하다가 정작 필요한 때에는 도움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허술한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예산과 인력을 늘려봐야 소용이 없다. 국보1호를 잃는 참담한 재앙을 겪었다면 교훈이라도 얻어야 한다. 그 교훈은 평상시나 위기 때나 제대로 작동하는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탁상공론과 전시행정이 판치는 공직풍토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srpark@sed.co.kr 한국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대형 사고가 터질때마다 되풀이되는 일들이 있다. 첫째는 예산타령 인력타령이고, 둘째는 발뺌하고 책임떠넘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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